방랑시인 김삿갓 1-39 회
방랑시인 김삿갓 1-39 회
김병연은 마누라가 빨래하러 나간 틈을 이용해 어머니에게 그와 같은 작별 인사를 고했다. 이씨 부인은 아들의 행장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니, 네가 난데없이 삿갓은 왜 썼으며, 동냥중처럼 지팡이는 왜 짚고 나섰느냐」
「저는 천하의 죄인입니다. 해를 보기가 부끄러워 이제부터는 언제나 삿갓을 쓰고 다닐 생각입니다. 먼 길을 가려면 다리가 아프겠기에 지팡이도 하나 준비했구요.」
김병연은 어머니에게 허리를 굽혀 보이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였다.
이씨 부인은 아들의 행장에서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한동안 침통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네 아낙은 지금 빨래를 나가고 집에 없다. 나들이를 다녀오려면 네 아낙에게도 알리고 떠나야 할 게 아니냐」
하고 말한다.
「그 사람한테는 어제밤에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지금 나가다가 빨래터에 잠깐 들러 가기로 하겠습니다.」
김병연은 되는 대로 꾸며 대었다.
이씨 부인은 장롱 속에서 돈 30냥을 꺼내더니 아들에게 내밀어 주었다.
「길을 떠나려면 노자가 필요한 법이다. 얼마 되지 않지만 이것을 몸에 지니고 가거라.」
김병연은 어머니의 애정에 가슴이 뭉클해 왔다.
「노자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돈은 제가 없는 동안 가사 (家事)에 보태 쓰시도록 하십시오.」
김병연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려 했으나, 어머니는 돈주머니를 억지로 품안에 넣어 주었다.
「네가 무슨 노자를 넉넉히 가지고 떠나겠느냐. 집에는 쌀도 많고 나무도 잔뜩 쌓아 놓고 있으니까, 집 걱정은 말고 어서 가지고 가거라. ......외가댁에 가면 외삼촌 어른께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실 것이니, 너는 그 말씀을 명심해서 듣거라.」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작별 인사를 고하고 집을 나서는 김병연의 눈에서는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김병연은 어머니를 속이고, 마누라는 만나 보지도 않은 채 기어코 집을 나오고야 말았다.
외가집에 간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 방편이었고, 마누라를 만나지 않고 떠난 것은, 마누라가 미워서가 아니라 삼생지연(三生之緣)을 대면해서 끊어 버리기가 너무도 괴로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집을 나서는 마음은 괴롭기만 하였다.
(이로써 가족들과는 영원히 못 만나게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김병연은 한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문득 자신을 꾸짖어 보았다.
(네가 마음이 그렇게도 약해 가지고, 어떻게 한평생을 방랑 생활로 보내겠다는 말이냐!)
자기 자신을 그렇게 꾸짖고 나자, 문득 옛시 한 구절이 머리에 떠올랐다.
대장부 어찌 눈물이 없으리오마는
이별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다.
丈夫非無淚 (장부비무루)
不灑離別間 (불여이별간)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김병연은 불현듯 취옹 노인이 들려주던 말이 다시금 머리에 떠올랐다.
하늘은 맑고 달이 밝아서
어느 하늘에나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건만
그대는 어찌하여
불나방처럼 등불 속으로만 날아들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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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40 회
김병연은 그 말의 깊은 뜻을 이제야 제대로 깨달은 것 같다. 문득 맑게 갠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하하하하..........」
하고 의식적으로 소리를 크게 내어 통쾌하게 웃어 보았다. 가슴 속에 뭉개 돌아가는 슬픔을 한꺼번에 떨쳐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미친 사람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바탕 앙천대소를 하고 나니, 마치 일진 광풍(一陳狂風)에 먹구름이 휩쓸려 버리듯 막막하던 가슴이 대번에 환하게 뚫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광풍제월(光風霽月)이니. 운권 청천(雲捲晴天)이니 하는 문자는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었는가보구나!)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보니. 지금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던 천산 만수(千山萬樹)가 눈앞에 우쭐우쭐 나타나 보인다.
<심지상무풍도즉 수재개청산녹수(心地上無風濤卽 隨在皆靑山綠樹)>라고 일러 주던 취옹 노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현실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렇다! 마음속의 물결을 잠재워 버리고 나니, 안전(眼前)의 삼라만상이 이렇게도 잘 보일 줄이야. 그러고 보면 이제부터는 산도 내 것이요. 물도 내 것이요 나무도 내 것이요. 하늘에 떠돌아 가는 구름조차도 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어찌하여 가족이라는 조그마한 인연에 얽매어 괴로와하고만 있었던 것인가. 나는 어리석게도 등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 되어서는 안된다. 구만리 장천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대붕(大鵬)이 되자.)
김병연의 마음은 마냥 상쾌하기만 하였다. 홍성 외가집에 가려면 남쪽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김병연은 발길을 정반대인 북쪽으로 돌렸다. 이왕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을 나선 바에는 우선 <천하의 명승)이라고 일러오는 금강산(金剛山)부터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병연은 깊은 산속으로 걸음을 옮겨 나가며 이제 앞으로의 행로를 생각해 보다가 문득 백낙천(白樂天)의 <태행로(太行路)>라는 시를 한 구절 연상하였다..
태행로라는 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태행은 길이 험해 수리를 꺾어 놓는다지만
그대 마음에 비하면 그래도 평탄한 길이요
무협의 물은 배를 뒤집어 엎는다지만
그대 마음에 비기면 그래도 순한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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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행로가 어렵기는
산에 있는 것도 아니요, 물에 있는 것도 아니요
다만 마음의 변덕 속에 있을 뿐이다.
太行之路能摧車 (태행지로능최차)
若比君心是坦途 (약비군심시탄도)
巫崍之水能覆舟 (무래지수능복주)
若比君心是安流 (약비군심시안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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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路難 不在山 不在水 (행로란 부재산 부재수)
秖在人情反覆間 (지재인정반복간)
그렇게 따지고 보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 <마음의 단속>일 것 같았다.
그리하여 김병연은 길을 걸어가며 <마음의 신조(信條)를 이렇게 세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