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73 회
방랑시인 김삿갓 1-73 회
현진사는 양반의 체통을 지키느라고 의관을 깨끗이 갖추고, 아랫목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김삿갓은 현 진사에게 정중하게 큰절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서울서 내려온 안동 김씨 김삿갓이올시다. 진사 어른께서는 일찌기 우참찬 벼슬을 지내신 석자, 규자를 쓰시는 이 안공의 후예라고 들었읍니다. 그렇다면 저의 집안과는 한집안이나 다름없는 어른이시기에 지나는 길에 인사나 여쭈려고 들렀을니다.」
현 진사는 안동 김씨라면 서울에서도 명문 대가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과객이 찾아와 <한집안 간>이라고 말하는 데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안동 김씨가 서울서는 명문대가임은 나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우리 가문과 안동 김씨 가문이 한집안이라는 것은 무슨 말씀인지 나는 이해를 못 하겠구료.」
이에 김삿갓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현 진사의 얼굴을 잠시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진사 어른은 시골에 사시는 관계로 두 가문의 인척 관계를 잘 모르시는가봅니다. 실은 저의 집 오대조 고모님이 현씨 가문에 출가를 하셨읍니다. 그래서 서울서는 지금도 두 가문이 한 집안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는 것이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멀쩡한 거짓말이었다. 따라서 현 진사로서는 처음 듣는 말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서울서는 두 가문이 한집안 간처럼 가깝게 지낸다고 하니, 서울 사정에 어두운 그로서는 수긍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아, 그렇던가요?.....그러고 보면 매우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내가 실례가 많았소이다.」
시골 사람들은 서울 사정에 어두운 관계로, 서울 이야기가 나오면 심리적으로 기가 죽어 버리게 마련이다. 김삿갓은 그런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현 진사의 콧대를 꺾어 놓는 데 우선은 성공한 셈이었다.
김삿갓은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는 조풍헌을 현 진사에게 이렇게 소개하였다.
「진사 어른께 이분을 소개하겠읍니다. 이분은 산 너머 마을에 사시는 조풍헌 영감님이신데, 제게는 외숙(外叔) 뻘이 되시는 분이 웁니다. 진사 어른과 아직 교분이 없으시다기에, 그럴 수가 있느냐 싶어 오늘은 제가 외숙님을 일부러 모시고 왔읍니다.」
현 진사는 조풍헌과 직접 인사는 없었어도, 얼굴만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왕을 기피해 온 이유는, 양반도 아닌 것이 돈푼이나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것이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돈 많은 <상것들>에 대한 가난뱅이 양반의 일종의 아집(我執)이었던지도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안동 김씨라는 양반이 상사람인 조풍헌을 외숙이라고 부르는 데는, 현 진사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도 명문 대가인 안동 김씨 가문에서 양반이 아닌 조풍헌네 와 통혼通婚)을 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현진사는 내심 적지않이 놀라며 김삿갓에게 묻는다.
「풍헌 영감을 외숙뻘이 된다고 하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안동 김씨 가문에서 양반이 아닌 가문과 통혼을 했을 리가 없지 않소이까.」
김삿갓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진사 어른께서 그런 의문을 품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물론 안동 김씨 가문에서 양반이 아닌 가문과 통혼을 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조 풍헌 영감님 댁이 지금은 비록 평민이라고 하지만, 근본을 따지고 보면 양반 중에서도 골수 양반이시랍니다. 세조 대왕 때에 영의정 벼슬을 지내신 조영무 대감의 후손을 누가 감히 양반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읍니까.」
현 진사는 그 말에 또 한번 놀랐다.
「아니, 조 풍헌이 영의정의 후손이라뇨? 영의정의 후손이 어째서 평민 행세를 한다는 말씀이오?」
김삿갓은 짐짓 한탄하는 기색을 보이며,
「사정을 알고 보면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풍헌 영감님의 오대조께서 이곳 정선으로 낙향(落鄕)을 하여 사셨는데, 집이 몹시 가난했던 관계로 사대조께서 쌀 천 석을 받고 양반을 팔아 버리셨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풍헌 영감님 댁에서는 평민 행세를 하시게 된 것이지요.」
현 진사는 들을수록 놀랍기만 하였다.
「양반을 돈 받고 팔아 버릴 수도 있는가요?」
「물론 전무 후무(前無後無)한 일이지요. 양반을 돈에 팔아 버린 그 사건이 얼마나 희한한 일이었으면 《양반전》이라는 책까지 나 왔겠읍니까. 여기 그 책이 있으니, 한번 읽어 보시지요.」
그리고 김삿갓은 미리 준비해 온 《양반전》을 현 진사에게 내밀어 보였다.
현 진사는 《양반전》을 받아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삿갓에게 묻는다.
「이 책은 처음 보는 책인데, 세상에 이런 책도 있었던가요?」
김삿갓이 대답한다.
「이 책이 바로 조 풍헌 영감님 선조께서 양반을 팔아 자신 경위를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책이옵니다. 별로 길지 않으니 한번 읽어 보시옵소서.」
현진사는 《양반전》을 묵묵히 읽어 보기 시작한다.
순한문으로 되어 있는 그 책의 서두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았다.
그 옛날 강원도 정선 고을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매우 현명하여 밤과 낮으로 글 읽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문명(文名)이 매우 높아, 새로 도입해 오는 원님마다 반드시 그의 오막살이를 찾아와 인사를 나누곤 하였다. 그런데 그 양반은 한 배기의 논밭도 가진 바 없었으니 살림이 궁색하기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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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74 회
현 진사는 여기까지 읽어 내려오다가, 문득 얼굴을 들며 김삿갓에게 묻는다.
「이렇게 가난하게 사시다가 마침내 가난을 견딜 수가 없어, 양반을 팔아 자셨다는 분이 바로 조 풍헌 영감의 오대 조부님이라 는 말씀인가요?」
김삿갓은 <이제 됐다!>싶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얼른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서울서 정선으로 낙향해 오신 분은 오대조이지만, 정작 양반을 팔아 자신 분은 풍헌 영감님의 사대조이십니다. 그 다음을 읽어 보시면 양반을 팔아 자시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올 것입니다.」
현 진사는 《양반전》을 죄다 읽어 보고 나서 동정을 금치 못하며 말한다.
「조 풍헌 영감 댁이 이런 훌륭한 양반 가문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비록 가난에 쪼들려 양반을 팔아 자셨다고는 하지만, 양반의 씨족이야 어찌 변동이 있으오리까.」
김삿갓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한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양반이란 씨족에 관한 문제이지, 매매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나 풍헌 영감께서는 선대 (先代)에 그와 같이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해서 양반의 본색을 일체 감춰 버리고, 그냥 평민으로 살아오고 계신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거액의 재산을 내놓아 서당을 설립하고 육영 사업 전념하고 계시니, 그런 점만 보아도 가문의 근본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현 진사는 그 말에 감탄을 마지않는다.
「허어...... 육영 사업을 하고 계시는가요?」
풍헌 영감은 이때라 싶어 얼른 대답을 가로막고 나선다.
「제게는 아들 아이가 하나 있사옵니다. 저는 그 애를 위해 성미재라는 서당을 세웠읍니다.」
김삿갓은 현 진사를 멋들어지게 없어 넘기는 이 판국에, 풍헌영감이 초를 치는 바람에 눈앞이 아찔하였다.
그리하여 얼른 화제를 엉뚱한 데로 돌렸다.
「참, 진사 어른! 풍헌 영감님께서 진사 어른을 찾아뵙는 기념으로 조그만 선물을 하나 가지고 오셨읍니다. 진사 어른께서는 정성으로 아시고 그 선물을 쾌히 받아 주셨으면 고맙겠읍니다.」
현 진사는 <선물을 가져 왔다>는 소리에 놀라움과 의아심을 금치 못한다.
「선물을 가지고 오시다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김삿갓이 대답한다.
「진사 어른의 회갑날이 멀지 않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회갑 잔치에 쓰시도록 송아지를 한 마리 몰고 오셨답니다. 회갑을 축하하는 뜻으로 가져 오신 모양이니까, 웃고 받아 두시는 것이 예의 일 것 같사옵니다.」
「엣? 송아지를?..........」
현 진사는 너무도 놀라와 눈을 커다랗게 떠보인다. 그 놀라움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기쁨에 넘쳐 있는 놀라움이었던 것이다.
「우리 두 가문이 아직 세교(世)가 없는데, 환갑을 축하해 주시기 위해 송아지를 몰고 오셨다니, 이 무슨 과분하신 후의 이시옵니까.」
조 풍헌은 머리를 정중하게 수그려 보이며 대답한다.
「제가 워낙 불민하여, 진사 어른을 진작 찾아뵙지 못한 것이 민망스럽고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현 진사는 그런 말을 들을수록 마음이 흔쾌하였다.
「풍헌 영감님이 그처럼 훌륭하신 분임을 모르고, 우리가 오늘날까지 너무도 소원하게 지낸 것이 나로서도 매우 송구스러운 일이올시다.」
이제는 현 진사의 말투가 매우 정중해졌다.
김삿갓이 다시 말한다.
「제가 찾아온 것을 계기로 두 가문이 세교를 두텁게 맺으신다면 저로서도 다시없는 기쁨이겠읍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 풍헌에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