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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81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4. 25. 15:09

방랑시인 김삿갓 1-81회

보림사의 돌중

언덕길은 높이 올라올수록 시야 (視野)가 넓어지는 것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산에 올라오면 안계 (眼界)가 이렇게도 광활해지는데, 세상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 비좁은 항간(巷間)에서 날마다 아옹다옹 싸움질만 하고 있는 것일까?)

김삿갓은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스러이 깨달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문득 공자(孔子)의 고사(故事)가 머리에 떠올랐다. 공자는 동산(東山)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서는 노(魯)나라 가 작다고 말했고, 그보다 더 높은 대산(太山)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서는 천하가 작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똑 같은 사람이라도 높은 데로 올라갈수록 기우(氣宇)가 커진다는 것 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성인(聖人)들의 도량(度量)이 바다같이 넓은 것도, 그들이야말로 세상 만사를 아득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득 깨닫고 보니, 어디선가 꽃향기가 바람결에 풍겨 오고 있었다. 정신이 황홀해 오도록 그윽한 향기였다.

자세히 보니, 저 멀리 덩굴 사이에 이름 모를 하얀 꽃들이 여러 백송이로 다복다복 피어 있었다. 냄새도 향기롭지만 꽃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김삿갓은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꽃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제아무리 꽃을 잘 그리는 화가라도 이 냄새만은 그릴 수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에 관한 옛글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옛글에 이런 말이 나온다.

꽃은 그려도 꽃의 향기는 그릴 수 없고 
눈은 그려도 눈의 맑음은 그릴 수 없고 
달은 그려도 달의 밝음은 그릴 수 없고 
샘은 그려도 그 물소리는 그릴 수 없고 
사람은 그려도 그 인정은 그릴 수 없다. 

繪花者不能繪其馨 (회화자불능회기형)
繪雪者不能繪其清 (회설자불능회기청)
繪月者不能繪其明 (회월자불능회기명)
繪泉者不能繪其聲 (회천자불능회기성)  
繪人者不能繪其情 (회인자불능회기정)

김삿갓은 글로서만 읽어 온 그 말들이 참다운 진리임을 이제서야 깨달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모든 물체의 진수를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그림이나 문장 같은 것은 너무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김삿갓은 눈앞에 전개되는 산천경개를 골고루 감상하자니 한이 없었다.

어느새 낮이 기울어 해는 중천에 떠 있다.

(이런 식으로 금강산까지 가면 몇 달이나 걸릴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걸음을 재촉해 걷다 보니, 저 멀리 산골짜기에서 탁발승(托鉢僧) 하나가 이쪽으로 부지런히 걸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진종일 홀로 거닐다가 처음으로 만나 보는 사람이 속인(俗人)이 아닌 스님이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스님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합장 배례를 하며 길을 묻는다.

「대사님! 금강산에 가려면 이 길로 가면 되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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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82 회


칠십이 가까와 보이는 노승은 합장으로 답례를 하더니, 김삿갓 의 얼굴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허어........ 금강산에 가시는 길이 오이까」

하고 묻는다.

대사는 코가 유난스럽게 매부리코인 것이, 무척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금강산 구경을 가는 길이옵니다.」
「금강산 구경을 가신다니 참으로 부러운 일이오이다. 소승도 금강산에서 삼년 가량 수도를 했는데, 금강산이야말로 하늘 아래 하나뿐인 선경(仙境)이 오이다.」
중이라는 사람이 <극락>이라는 말을 쓰지 아니하고 <선경>이라 는 말을 쓰는 것이 어쩐지 수상쩍었다.

(매부리코는 성품이 간악하다고 들었는데, 혹시나 눈앞의 대사는 그런 부류의 중은 아닐까?)

김삿갓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어서,

「금강산이 그처럼 좋은 곳이라면 대사께서는 어찌하여 신경을 버리고 삭제(솜)로 나오셨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탁발승은 눈을 감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두어 번 외고 나더니,

「소승은 전생에 업보(業報)가 많았던지 오도(悟道)를 걷기에는 번뇌가 너무도 많아, 스스로 <돌중>으로 자처하며 동냥질을 떠돌아다니는 길이오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 입으로 돌중이라고 자처하니 김삿갓은 할말이 없었다. 」

「대사는 무슨 겸허의 말씀을」 

김삿갓은 인사치레로 웃어 보이고 나서,

「여기서 금강산까지 가려면 며칠이나 걸리면 됩니까?」

하고 화제를 본궤도로 돌려 버렸다. 탁발승은 빙그레 장난기 어린 웃음을 웃고 나더니,
「파발마 모양으로 앞만 내다보고 부지런히 걸어가면 열흘, 이 산 저 산을 유람하며 놀아리 가락으로 걸어가면 일 년도 그만, 십 년도 그만, 서방 극락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세계는 십억 만리 저쪽에 있다고 하지만, 도(道)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극락이 마음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강산이 멀고 가까운 것은 오직 각자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을 것이 오이다.」

하고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아리송한 소리를 지껄여대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도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 많은 사람치고 신통한 사람이 없는 법이다. 선가(禪家)에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이 있는데, 협잡꾼이 아닌 바에야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단 말인가.

김삿갓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탁발승과 작별하고 다시 제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산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만이 요란스럽게 들려올 뿐, 인적조차 없는 적막강산이었다.

새소리를 들어가며 눈앞의 산을 넘고 나니, 또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어느 길이 금강산으로 가는 길인지를 알 수가 없건만, 사람을 만나야 길을 물어 볼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설봉(峰) 강백년(姜栢年)의 <산행(山行)>이라는 시가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십리 먼길에 인적이 없어
산은 텅 비었는데 새만 우는구나
중을 만나 길을 물어 보았지만
중이 가고 나니 길을 또 모르겠네.

十里無人響 (십리무인향)
山空春鳥蹄 (산공춘조제)
逢僧問前路 (봉승문전로)
僧去路還迷 (승거로환미)

지금의 김삿갓의 정경을 그대로 읊어 준 듯한 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