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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87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4. 28. 14:36

방랑시인 김삿갓 1-87 회
 
윤 부자네 집에서 냉혹하게 쫓겨나고 보니, 김삿갓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잠자리를 거절당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잠자리가 정말로 없으면 하룻밤 쯤은 남의 집 외양간에서도 잘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못 받은 일이 너무도 홍분 되었던 것이다.
심정이 그쯤 되고 보니, 김삿갓의 입에서는 욕이 절로 나올 밖 에 없었다.

「돼먹지 못한 것들. 옛날부터 윤가(尹)를 <소>라고 일러 오지 않았던가. 소란 놈은 명절 때면 도살장으로 끌려가 잡아 먹히게 마련인 것. 그놈들이 지난번 단오절만은 무사히 넘겼지만, 돌아오는 추석 명절에는 모두가 도살장으로 끌려가 잡혀 먹히고 말 게 되리라.」

여간해서는 남에게 악담을 할 줄 모르는 김삿갓이건만, 윤부자 네에게 대해서만은 악담이 절로 나왔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소리 높이 읊어 대었다.

동림산 기슭에 봄풀이 우거져 
큰 소 작은 소 긴 꼬리 휘두르네 
오월 단오는 근심 속에 넘겼지만 
추석 명절에는 몸을 떨게 되리라. 

東林山下春草綠 (동림산하춘초록)
大丑小丑揮長尾 (대축소축휘장미)
五月端陽愁裡過 (오월단양수리과)
八月秋夕亦可畏 (팔월추석역가워)

지독한 악담시였다.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시로써나마 달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 왔다.
이러나저러나 날은 어둡고 배는 고파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20리를 더 가면 서당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 말도 믿을 수가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산골 사람들은 거리감이 워낙 둔하여, <바로 저기>라는 말을 믿고 정작 가보면 10리, 20리를 넘기가 일쑤요, 손을 들어 가리키며 <저기>라고 말하면 5, 60리가 되기는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더 이상은 걸을 기력이 없어, 길가에 있는 오막살이 집으로 찾아들어가 주인을 불렀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더니, 파파 할아버지가 밖을 내다보며 묻는다.

「누구를 찾으시우?」
「저는 지나가는 과객이올시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재워 주실 수 있을는지요?」

주인 할아버지는 난처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젊은 양반이 어찌다가 길이 늦으셨구료. 우리 집은 방이 하나 밖에 없어요. 그러나 내 집을 찾아온 나그네를 밖에서 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우리 집이 잠자리는 불편하겠지만, 하룻밤쯤 고생할 셈치고 어서 들어오시오.」

하고 대번에 잠자리를 쾌락해 주는 것이 아닌가. 피도 눈물도 없던 윤 부자네에게 비기면 이 집 할아버지는 부처님처럼 자비로운 분이라고 여겨졌다. 인심이 후하고 박한 것은 돈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인 성싶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님.」

인사를 깍듯이 하고 방안으로 들어와 보니, 과연 방은 하나 뿐인데 식구는 아들 내외와 할머니까지 네 명이라는 것이 아닌가. 

「어서 앉아요. 방이 비좁아서 오늘밤은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겠소. 그러나 바깥에서 자기보다는 편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손님을 맞아들이는 주인 할아버지의 마음씨가 하도 정성스러워 김삿갓은 눈시울이 뜨거워 올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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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88 회

아닌게 아니라, 다섯 사람이 자기에 방은 너무도 좁았다. 그러나 노인의 성의를 무시하고 되돌아 나올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살림이 얼마나 가난한지 방에는 가재기물(家財器物)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아랫목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노파는 쪼그랑 표주박처럼 늙어 빠졌고, 웃목에서 서성거리는 아들은 가엾게도 다리가 절름발이였다. 며느리는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 오시는지 몰라도 몹시 시장하겠소. 며느리가 지금 밥을 짓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시오.」

노인은 인사를 나누고 나서 부엌에다 대고 다음과 같은 소리를 지른다.

「애야, 손님이 한 분 오셨으니 밥을 한 그릇 더 지어라.」

그러자 부엌에서 여인의 목소리로 대답이 날아온다.

「알았어요. .........땔감이 조금밖에 없는데 어떡하죠?」

주인 할아버지가 얼른 대답한다.

「땔감이 모자라거든 우선 울타리를 헐어다 때려무나. 울타리는 내일 생나무를 베다가 새로 만들면 될 게 아니냐. 」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주고받는 말이 오직 놀랍기만 하였다. 세상에 이렇게도 가난한 집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생면부지의 나그네를 기쁜 마음으로 맞아 주는 그 자비심 주인 할아버지야말로 부처님의 화신(化身)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꾸만 절실해 왔다.

「할아버지께서는 이 산골에 언제부터 사십니까.」

김삿갓은 지나가는 말로 물어 보았다.
그러자 노인은 웃으면서 대답한다.

「글쎄, 언제부터 살아왔다고 할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부터 대대로 이 집에 살아오고 있다오.」

주인 할아버지가 일체의 욕망을 떠나 부처님처럼 자비롭기만 한 것은, 어쩌면 세속적인 오염에 물들지 않고 순전히 자연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불현듯 <태고지민(太古之民)>이라는 말이 연상되었다. 주인 할아버지야말로 단군(檀君)이 개국(開國)했을 때 부터 살아오는 백성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몇 형제나 두셨읍니까.」

그러자 노인은 웃목에 앉아 있는 아들을 쳐다보며 대답한다. 

「아들을 두기는 삼 형제를 두었다오. 그러나 집에 남아 있는 아들은 저 애 하나뿐이지요.」
「두 아드님은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읍니까?」

두 아들은 불효 막급하게도 늙은 부모와 병신 동생을 내버려두고 어디를 갔을까 싶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웃으며 김삿갓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젊은이는 타지(他地)에서 와서, 이 지방 사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구려. 옛날부터 강원도에서는 <아들을 삼 형제를 둬야만 집에 하나가 남아 있게 된다>는 속담이 전해 오고 있다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아들을 삼 형제를 두었는데, 두 사람은 어디를 가고 집에는 한 사람만 남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주인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중이 되어 집을 나가고, 또 하나는 호랑이한테 물려 가고, ......그러니까 셋 중에서 집에는 하나만 남을 게 아니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이 지방에는 호랑이가 그렇게도 많습니까.」
「많구 말구. 호랑이도 많지만, 금강산에 들어가면 절은 호랑이 보다도 더 많다우. 절이 얼마나 많으면 팔만구 암자 (庵子)라고 하겠소.」
「그러면 할아버님의 아드님도 하나는 호랑이한테 물려 가고, 하나는 중이 되어 집을 나갔다는 말씀입니까.」
「강원도 산골에 사는 사람은, 그런 사정은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라오. 금강산에 직접 들어가 보면 아시겠지만, 금강산에는 골짜기마다 절이 두셋씩 있는데, 절마다 중이 몇 백 명씩 된다오.」 
「그 말씀을 들으니 말씀인데, 저는 지금 금강산 구경을 가는 길이옵니다. 이왕 가는 김에 할아버님 댁 아드님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군요. 지금 어느 절에 있으며 법명(法名)을 뭐라고 하는지 좀 알려 주시죠.」
「허어...젊은이는 지금 금강산에 들어가는 길인가, 젊은이도 내 아들처럼 중이 되고 싶어서 금강산에 가는 것이오?」
「아닙니다. 저는 중이 될 생각은 없고, 단지 구경을 갈 뿐입니 다. 그러나 아드님을 만나 안부라도 전하고 싶으니, 절 이름과 법명을 꼭 좀 알려 주십시오.」
「그 애의 아명(兒名)은 수동(壽童)이라고 하는데, 중이 되고 나서는 이름을 뭐라고 고쳤다고 하더라? 하도 오래되어 어느 절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러자 웃목에서 듣고 있던 절름발이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