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101 회
방랑시인 김삿갓 1-101 회
「나는 하도 오랫동안 독수공방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시호 (時效)가 지나 버린걸요.」
이번에는 백광석이 반기를 들고 나온다.
「아따, 화로에도 시효라는 것이 있는가.」
「물론이죠. 무쇠 화로를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녹이 슬어 버리거든요」
그러자 백광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단식하듯 말한다.
「아이구 하느님 맙소사. 그러면 우리 집 큰마누라의 무쇠 화로에 녹이 슬 때까지는, 나는 날마다 들볶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와 같은 잡담을 한없이 주고받는 동안에 어느덧 날이 저물어 김삿갓은 잠자리가 걱정스럽게 되었다.
『여보시오, 주모! 나 오늘밤 이 집에서 좀 자고 갈 수 없겠소.」
그러자 백광석은 쌍지팡이를 짚고 나선다.
「주모는 이미 녹이 슬어 버렸다는데, 노형은 무엇 때문에 이집에서 자고 가려고 그러시오.」
「에이, 이보시오. 아무리 농담이라도 욕심이 다 된 할머니한테 그런 농담은 안 하는 법이오.」
김삿갓은 백광석을 점잖게 나무라 주고 나서, 주모에게 정식으로 부탁한다.
「잘 데가 없어 그러니, 하룻밤 자고 가게 해주시오.」
주모가 대답한다.
「방은 하나밖에 없어서 안 되겠고, 술청이라도 괜찮다면 자고 가시구료.」
김삿갓은 좋은 방 나쁜 방을 가릴 형편이 못 된다.
「술청이라도 좋으니 재워 주기만 하시오....... 술값이 얼마죠? 우선 술값부터 치르고 봅시다.」
김삿갓은 주모의 말대로 전대 속에서 돈을 꺼내 주었다.
백광석은 전대 속에 돈이 두둑이 들어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눈빛을 이상하게 희번덕거렸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하고 백광석에게 말을 건넨다.
「노형도 집에 돌아가 보았자 어느 마누라도 환영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오늘밤은 차라리 여기서 나하고 같이 자는 것이 어떻겠소.」
백광석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뒤로 훌렁 자빠져 버린다.
「아닌게 아니라, 나도 갈 데가 없는 몸이오.」
「마누라가 둘씩이나 있으면서 갈 데가 없다니, 그야말로 상하사불급(上下寺不及)이 구료.」
「그러니까 나를 여기서 좀 재워 주시오.」
「잘 생각하셨소. 서방 귀한 줄을 알게 하려면 가끔 외박도 필요한 것이라오.」
김삿갓은 그런 농담까지 해가며 등잔을 끄고 누워 버렸다.
눈을 감으니, 간밤에 다정다감하게 지냈던 홍련이라는 처녀의 고운 얼굴이 어둠 속에 아련히 떠올라 보인다.
「다정 불심(多情佛心)!」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부처님 같은 처녀가 아니고서는 그렇게도 다정할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깨닫고 보니, 홍련의 얼굴은 어느새 마누라의 얼굴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집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던 마누라가 이제는 누구보다도 그리웠던 것이다.
마누라와 함께 어머니 생각도 간절해 왔다.
(젊어서 홀로 되어 많은 고생을 해오신 어머니는, 불효 막급한 자식을 멀리 보내 놓고 지금쯤 얼마나 슬퍼하실까?)
김삿갓은 문득 <기문지망 (奇門之望)>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침에 나간 자식이 저녁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문간에 기대서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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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02 회
그런데 김삿갓은 늙은 어머니를 속여 가며 집을 나와 버린 지 이미 몇 세월이나 되었는가. 술을 설친 때문인지, 이날 밤 따라 고향 생각으로 잠을 이루기 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한창 곤히 자다가 몸이 써늘해 오기에 문득 눈을 떠보니, 옆에서 자고 있던 백광석이 보이지 않았다.
「응? 이 친구가 어딜 갔을까?」
이상한 예감이 들어 허리를 만져 보니, 간밤에 분명히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가 없어졌다.
(앗! 이 친구가 돈을 훔쳐 가지고 달아났단 말인가?)
무일푼이 되어 버린 김삿갓은 눈앞이 아뜩해 왔다.
객지에서 전대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사고가 아니다. 그러나 김삿갓은 백광석이라는 친구가 전대를 훔쳐 갔으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술까지 나눠 먹은 그 친구가 설마 돈을 훔쳐 가기야 했을라구!)
김삿갓은 그런 생각이 들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전대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전대는 보이지 않는다. 백광석이 전대를 훔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새벽같이 도망을 가 버렸을 것 인가.
(이제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아주 몹쓸 친구였구나.)
혼잣말로 투덜거리고 있노라니까, 주모가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며 묻는다.
「손님은 아까부터 무엇을 찾고 있어요? 무언가 없어진게 있어요?」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가 간밤에 감쪽같이 없어졌군요.」
그 소리에 주모는 잉큼 놀라며,
「아이구머니! 전대가 없어지다뇨?」
그리고 사방을 두루 둘러보다가,
「같이 자던 백씨라는 사람은 어디 갔어요?」
하고 묻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졌군요.」
「엣? 그렇다면 전대는 그 사람이 훔쳐 간 것이 분명해요. 어쩐지 인상이 좋지 않은데다가, 큰마누라가 어쩌니 작은마누라가 어쩌니 하며 씨가 먹히지 않은 허풍을 떠는 것이 수상하다 싶더니 역시 그놈은 도둑놈이었군요. 그런 놈을 내 집에 재웠으니, 아이 무서워라.」
김삿갓은 무섭다는 말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도둑이기로 집까지 떠갈 것은 아니니까 그 점은 걱정 마시오.」
「이러나저러나 돈을 몽땅 도둑맞았으니 어떡하시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본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인걸요. 그 친구가 그런 원리를 모르고 인정머리 없이 도둑질을 했으니, 나는 잃어버린 돈이 아쉽다기보다도, 인정을 배반한 그 친구의 소행이 슬프기만 할 뿐이오.」
김삿갓은 낭중에 무일푼이 되고 보니 처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지만, 애써 태연하려고 노력하였다.
「손님은 돈을 몽땅 잃어버리고 나서도 부처님 같은 소리만 하고 계시네요. ............빨리 서둘러 관가에 고발을 하세요. 그런 놈은 당장 붙잡아다가 능지처참을 시켜 버려야 해요.」
「고발을 한다고 그 친구가 쉽게 잡힐 것 같소. 능지 처참을 한다는 것도 사람으로서는 못 할 노릇이고.............」
김삿갓은 관가에 고발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아이 참, 손님은 언제까지나 부처님 같은 소리만 하고 계실 거예요?」
「석가모니도 사람이 부처님으로 승화한 것이지 처음부터 부처님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랍니다.」
김삿갓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