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133 회
방랑시인 김삿갓 1-133 회
언덕길을 다 올라와 보니, 반 기와집 기둥에 <孔>라는 간판 <中>이라는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고, 안에서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 나오고 있었다.
마당에서 주인을 부르니 서당문이 <탕!> 열리며,
「거, 누구냐?」 한다.
매우 방정맞은 목소리였다.
방안에서 내다보는 사람은 나이가 오십 세 가량 되었을까. 유관 (儒冠)을 뒤로 제쳐 쓰고 있는데, 팔자 수염에 얼굴이 세모꼴로 뾰족하게 생겨서, 첫눈에 보아도 몹시 경망스러운 인상이었다.
(물어 보나마나 저 사람이 알랑방귀 선생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봉 선생인가보구나.)
김삿갓은 속으로 그렇게 짐작하며,
「저는 지나가던 과객이올시다. 하룻밤 신세를 지고 갈까 싶어 찾아왔사옵니다.」
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문제의 사람은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뭐? 하룻밤 자고 가고 싶다구?............여기는 객주집이 아닐세. 집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하고 매정스러운 태도로 나온다.
김삿갓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술책을 쓰기로 하였다.
「저는 무봉 선생께서 경영하신다는 공맹재라는 서당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혹시 무봉 선생은 댁에 계실는지요.」
그러자 무봉 선생은 별안간 얼굴에 환희의 빛이 감돌며,
「뭐? 자네는 무봉 선생을 찾아온 사람이라구? ...... 무봉이란 세상 사람들이 바로 나를 두고 부르는 이름일세. 자네는 명성을 어디서 듣고 찾아왔는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자네라고 부르는 것은 예의를 모르는 오만 불손한 짓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실속만 차렸으면 그만이므로, 굳이 그런 일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짐짓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며 이렇게 치켜 올려 주었다.
「공맹학에도 밝으시고, 의술에 있어서도 화타 (華陀) 편작(扁鵲) 보다도 훌륭하시다는 무봉 선생의 선성(先聲)을 진작부터 받들어 모셔 오면서도, 직접 찾아뵙기가 너무도 늦어서 매우 죄송합니다.」
김삿갓은 며칠 동안 푹 쉬어 가고 싶은 생각에서 거짓말을 적당히 꾸며 대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과도한 칭찬에 오히려 자기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의 효과가 그렇게도 클 수가 없어서, 무봉 선생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버선발로 달려 나와 김삿갓을 방안으로 맞아들이며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명성을 듣고 이 산중까지 일부러 찾아왔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네 그려. 어서 들어가세.」
서당 방에 들어와 보니, 글을 읽는 아이들은 모두 합해야 일곱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일곱명의 아이들이 한결같이 《천자문》 을 읽는 조무래기들뿐이었던 것이다.
머리가 큰 아이는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을 사람들이 무봉 선생의 실력을 믿지 않는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무봉 선생이라는 자는 <명성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노라>는 말에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허어! 자네가 나의 명성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단 말인가?」
김삿갓은 한번 거짓말을 해놓았으므로, 이제는 싫든 좋든 간에 그렇다고 밀어붙일 밖에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선생은 학덕이 워낙 높으시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러자 무봉은 의문의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혼잣말 비슷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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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34 회
「그거 참 이상한 일이로다. 나는 누구처럼 이름을 팔고 돌아다닌 사람도 아닌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무봉 선생이라는 자는 직접 대놓고 말은 아니했지만, 김삿갓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자는 보통내기가 아니로구나!)
김삿갓은 속으로 적지않이 당황하며 얼른 이렇게 꾸며 대었다.
「선생은 비록 산속에 숨어 살고 계시다고는 하지만, 사향노루는 아무리 깊은 산속에 살아도, 그 향기가 천리 밖에까지 풍긴다 고 하지 않습니까. 선생이 비록 산속에 숨어 계시기로, 그 명성이야 어찌 숨길 수 있으오리까.」
어거지로 둘러댄 변명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무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사향노루의 비유는 천하의 명담이네그려. 그러고 보면 자네는 학식이 보통이 아닌 모양인걸. 자네는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
「많이는 읽지 못했지만, 몇 해 동안 글방에 열심히 드나든 일은 있사옵니다.」
「음. 그렇다면 시도 지을 줄 알고 있겠네그려?」
「잘 짓지는 못하오나 이럭저럭 흉내는 낼 수 있사옵니다.」
「그러면 내가 운자(韻字)를 불러 줄 테니, 시를 한수 지어 보겠는가. 자네가 시를 잘 지으면 나는 자네를 선비로 알고 내 집에서 융숭하게 대접하도록 하겠네. 그러나 만약 시를 짓지 못할 경우에는 저녁이나 먹여서 쫓아내기로 하겠네.」
무봉 선생은 김삿갓의 학력을 단단히 시험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물론 시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짐짓 겁먹은 시늉을 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같이 위대하신 어른께서 시를 지으라고 하시니, 어쩐지 몸이 떨리웁니다. 시가 다소 서툴더라도 관대하게 보아 주시옵소서.」
「이 사람아! 학문에는 <관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이네.」
「알겠읍니다. 그러면 운자를 불러 주시옵소서.」
「운자를 한꺼번에 부르지 아니하고, 한 구절을 지을 때마다 운 자를 한 자씩 따로따로 불러 줄 테니 그리 알게!」
그리고 나서 무봉 선생은 첫 번째의 운자를,
「멱!(覓)」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멱(覓)>이라는 글자는 시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벽자(僻字)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벽자를 운자로 불러 준 것은, 김삿갓에게 골탕을 먹이려는 흉계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일단 운자를 불러 받았으니, 김삿갓으로서는 <覓>자를 넣어 시를 지을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김삿갓은 무봉의 입에서 운자가 떨어지기 무섭게 기구(起句)를 이렇게 읊었다.
허구 많은 운자 중에서 하필이면 왜 <멱>자란 말이오.
許多韻字何呼覓 (허다운자하호멱)
첫구절은 그것으로써 시험에 통과된 셈이었다.
무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번째의 운자도 또다시,
「멱!」
하고 똑같은 글자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운자라는 것은 본시 똑같은 글자를 두 번 부르는 법이 아니다. 무봉 선생이 그 정도의 법칙을 모를 리가 없건만, 똑같은 운자 를 두 번씩이나 부른 것은 역시 김삿갓에게 골탕을 호되게 먹이려 는 계획적인 음모임이 분명해 보였다.
김삿갓은 싫든 좋든 간에 두번째의 구절인 승구(承句)도 <覓>자를 넣어서 지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