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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35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5. 21. 15:41

방랑시인 김삿갓 1-135 회

아까도 멱자가 어려웠는데 또 <멱>자란 말이오.

彼覓有難況此覓 (피멱유난황차멱)

무봉 선생은 그 시구를 들어 보고 크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 다음은 전구 (轉句)를 지어야 할 차례다.

본시 세번째의 구절에는 운자가 필요치 않은 법이다. 그러나 무봉은 그와 같은 법칙을 무시하고 이번에도 또다시,

「멱!」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김삿갓은 운자가 필요치 않은 전구조차도 <覓>자를 넣어서 지을밖에 없었다.

세번째의 구절은 이러하였다.
하룻밤 자고 가는 일이 오직 <멱>자에 달려 있구나.

一夜宿寢懸於覓 (일야숙침현어멱)

무봉 선생은 또 한번 놀라 보이며 결구(結句)의 운자도 역시,

「멱!」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은근히 화가 동했다. 그리하여 마지막 구절은 무봉을 욕하느라고 이렇게 읊었다.

산골 훈장이 알고 있는 글자는 오직 <멱>자 하나뿐이더냐! 

山村訓長但知覓 (산촌훈장단지멱) 

진실로 김삿갓 같은 천재 시인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었다. 더구나 마지막 구절은 산골 훈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김삿갓이 <멱>자를 넣어 가지고 기승전결의 네 구절을 지체 않고 척척 읊어 내자, 무봉은 별안간 김삿갓의 손을 덥썩 움켜잡으며 감격어린 어조로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구, 선생! 이제부터는 선생을 나의 스승으로 모셔야 하겠읍니다.」

조금 전까지도 토라지게 <자네>라고 불러오던 사람이, 별안간 <스승>으로 모시겠노라고 선포하고 나오니 김삿갓은 놀랄밖에 없었다.

「무봉 선생께서 별안간 왜 이러십니까. 농담이 너무 지나치시웁니다.」

김삿갓은 무봉의 행위를 농담으로 돌려 버리려 하였다.
그러나 무봉은 성품이 음흉하면서도 솔직한 일면이 있었다.

그는 김삿갓의 손을 힘차게 움켜잡으며,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었다.

「내 이제 선생에게야 무엇을 숨기겠소이까. 선생이 시에 그렇게도 활달하신 것을 보면, 선생은 《사서삼경》에도 능통하신 분임이 확실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명심보감》밖에 읽지 못한 놈이옵니다. 그러니 내 어찌 선생 같은 어른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상대방의 말을 액면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선생은 사람을 놀려도 분수가 있지, 공맹재의 훈장 어른이 《명심보감》밖에 읽지 않았다고 하면, 그 말을 누가 믿겠읍니까.」 

그러자 무봉은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다시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선생님만은 속일 자신이 없읍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한 것입니다. 선생은 조금 전에 시를 지으실 때 마지막 구절에서, <산골 훈장 놈이 알고 있는 글자는 오직 <멱>자뿐이냐> 하고 호통을 치셨는데, 나는 그 소리 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읍니다. 그처럼 예리한 형안(炯眼)을 가지고 계신 선생을 감히 나 같은 놈이 무슨 재주로 속일 수 있 으오리까」

김삿갓은 일시적인 화풀이로 <멱 자밖에 모르느냐>고 말했을 뿐 이었는데, 그 구절이 상대방에게 그처럼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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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36 회

그리하여 김삿갓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무심코 그렇게 읊었을 뿐이니, 그 말을 너무 고깝게 생각지 마십시오.」
「고깝게 생각하다뇨. 무슨 말씀입니까.....이왕 말이 났으니 내가 이 산중에 들어와 훈장 노릇을 하게 된 경위를 모두 말씀드리기로 하겠읍니다.」

그리고 무봉은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무봉 선생의 본명은 이진수(李韻鎭洙). 그는 본시 양양(陽) 산중에서 건달패로 살아왔었다. 그러다가 열여섯 살 먹은 누이동생을 김 부자에게 소실로 주면서 집을 한 채 얻어 가지게 되자, 그집을 이용해 일약 서당 훈장으로 둔갑을 했다는 것이었다.

「《명심보감》밖에 읽지 못했다는 분이 어떻게 훈장이 될 생각을 하셨소?」

김삿갓이 즉석에서 반문하자, 이진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팔자 좋게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 훈장 이외에 또 뭐가 있겠읍니까. 그래서 매부인 김부자의 도움을 받아 훈장이 된 것이지요.」

협잡성은 많아도 머리만은 민첩하게 돌아가는 사람임이 분명하였다.

무봉 선생이라고 자칭해 오던 이진수 훈장은 자신의 허위 생활을 툭 털어놓고 나더니, 가슴이 후련해졌는지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한테나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날마다 허풍만 떨며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날마다 거짓말만 하며 살아가려면 그처럼 괴로운 일은 없을지 모른다.

김삿갓은 웃으며 대답한다.

「누구나 거짓말을 적당하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 생활이 아니겠읍니까」
「나도 그렇게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에서 열까지 거짓말만 하면서 살아오자니 너무도 괴로와요. 훈장이 되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준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의사로서 남의 병을 고쳐 준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소위 향약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마을 사람들을 선도한다는 것도 멀쩡한 연극이었고...... 」

「선생은 머리가 너무도 좋아, 여러 방면으로 욕심을 부려서 그렇게 되신 모양이군요.」
「한마디로 말하면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은 욕심에서 그런 수법을 쓰게 된 것이지요.」
「아무리 그렇기로 서당방에 약국 간판까지 내건 것은 어떻게 된 일이오?」
「나는 어렸을 때 눈병을 많이 앓았어요. 할아버지께서는 그럴 때마다 어린 아기들의 오줌을 받아 눈에 넣어 주면 눈병이 깨끗하게 낫곤 하더군요.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 경험을 밑천으로 삼아 약국 간판을 내걸게 된 것이지요. 산속에 사는 돌팔이 의원들이란 대개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 아니겠어요.」

자기 입으로 <돌팔이 의원>이라고 자칭하고 나오는 데는 할말이 없었다.

김삿갓은 웃으면서 물어 본다.

「눈병 환자가 왔을 때에는 아기 오줌으로 고쳐 주면 된다고 합시다, 그러나 약국을 찾아오는 환자는 반드시 눈병 환자만은 아닐 것이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셨소?」
「그것도 경우에 따라 약을 적당히 지어 주면 되니까, 별로 걱정할 것은 없었읍니다.」

대답이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배짱이 좋아도 이만저만 좋은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