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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8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6. 1. 14:28

방랑시인 김삿갓 2-8 회

「나도 이 마을에 살려면, 마을 사람들의 성분을 대강은 알고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무봉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허기는 그렇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백촌 마을 사람들의 인적 구성을 간략하게나마 말씀드리기로 하겠소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백락촌이라는 곳은 잡동사니 범죄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오.」

김삿갓은 그 말에 크게 놀랐다.

「엣? 백락촌은 잡동사니 범죄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뇨? 그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들의 범죄 사실은 천태 만상이라오. 어떤 사람은 깊은 산속에서 산적 노릇을 해먹다가 개과천선하여 백락촌으로 찾아오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살인 대행업자 노릇을 하다가 갱생의 길을 찾아오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유부녀 강간을 하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에 본서방을 도끼로 패 죽이고 도망을 쳐서 오기도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관가에 들어가 보물을 훔쳐 내온 죄로 전국에 지명 수배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백락촌으로 피신을 해오기도 하였고.........」

김삿갓은 거기까지 듣다가 전신에 소름이 끼쳐 와서,

「아니, 백락촌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그처럼 흉악한 범죄자들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무봉은 태연스럽게 이렇게 대답한다.


「말하자면 그런 사람도 더러 섞여 있다는 말이지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요 아무려나 백락촌 마을 사람들의 전신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어요 소금장수, 엿장수, 방물장수, 새우젓장수, 날치기, 들치기, 투전꾼 등등 별의별 협잡질을 다 하다가 백락촌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일 것만은 틀림이 없어요.」

김삿갓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인생을 그렇게도 험악하게 살아오던 사람들이 어쩌다가 모두들 백락촌으로 모여들게 되었읍니까?」

무봉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인지 김삿갓은 가늠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절반쯤 탕감을 해 듣더라도, 백락촌 마을 사람이 결코 순박한 농민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마을의 이름은 백락촌이건만, 무봉의 말대로라면 백락촌은 <범죄자들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어쩌다가 하필이면 범죄자의 소굴에 들어와 훈장 노릇을 해먹게 되었단 말인가.) 

김삿갓은 속으로 신세 한탄을 하다가,

「그들은 죄를 짓고 나서 모두가 백락촌으로 모여 왔다고 하는데, 그들이 백락촌으로 모여 온 데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겁니까?」 

무봉은 그 질문에는 대답을 아니하고,

「그들은 과거에 많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모두가 마음을 고쳐 먹고 새사람이 되려고 백락촌으로 모여들었다는 사실만은 알고 계셔야 해요.」
「허기는 내가 만나 본 사람들은 악인 같아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읍니다. 아무리 흉악하던 사람도 마음을 고쳐 먹으면 얼굴도 달라지는 모양이지요?」
「암! 그렇구 말구요. 사람은 본시부터 악한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요. 지금은 모두가 선량한 사람들이랍니다.」
「이러나저러나 이 지방 저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오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백락촌으로 모여들어 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김삿갓은 아까부터 수수께끼로 여겨 오던 일을 무봉에게 정면으로 물어 보았다.

무봉이 대답한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요」
「그 이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이유를 좀 말씀해 주시죠.」

그러자 무봉은 웃으면서 반문한다.

「선생은 혹시 <십생지지(十生之地)>라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있으시오?」
「십생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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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9 회

김삿갓은 <십생지지>라는 말을 듣자, 대뜸 《정감록》이라는 책을 연상하였다. 《정감록》에 의하면 마갈족(摩蝎族)의 내습(來襲)으로 인해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전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곳이 열 군데가 있으니, 죽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그곳으로 피난을 가라는 것이었다. 《정감록》 은 그런 곳을 <십생지지>라고 일러 왔던 것이다.

「십생지지라면, 《정감록》에 나오는 십생지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삿갓이 즉석에서 그렇게 반문하자 무봉은 무릎을 탁 치면서 말한다.

「과연, 선생은 놀랄 만큼 박식하시오. 선생은 이미 《정감록》도 읽으신 모양이구료!」

김삿갓은 고개를 갸울이며,

「《정감록》을 읽기는 읽었읍니다마는, 내가 읽은 책에는 십생지지에 백락촌이라는 곳은 들어 있지 않았는데.........」
「나는 《정감록》을 읽어 본 일이 없어서 《정감록》에 백락촌이라는 마을이 나오는지 어쩐지 모르지요. 그러나 백락촌이 보통 마을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요.」
「보통 마을이 아니라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무봉은 자신만만한 어조로 대답한다.

「백락촌이라는 마을이 십생지지의 하나로 꼽혀 있는지 어쩐지 그런 것은 나는 몰라요. 그러나 제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백락촌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무 탈 없이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김삿갓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묻는다.

「선생은 어디다 근거를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어디다 근거를 두고 그런 말을 하느냐구요? 근거는 뚜렷합니다. 선생은 이 마을의 지세(地勢)를 모르시는 모양이지만 풍수학 (風水擧) 상으로 보아서, 백락촌은 <지구상의 낙원>인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풍수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읍니다. 어디다 근거를 두고 백락촌을 지구상의 낙원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설명을 할 테니 들어 보시려오? 선생도 유심히 보면 아실 일이지만, 백락촌은 네 개의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깊은 산속의 분지(盆地)예요. 마을의 뒷면에 우뚝 솟아 있는 주산 (主山)이 석가산(釋迦山)이고, 좌우에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는 산이 문수산(文殊山)과 보현산(普賢山)이고, 남쪽을 가로막고 있는 산봉우리는 아난봉(阿難峰)이라오. 문수보살(文殊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이 석가여래 (釋迦如來)를 좌우에서 받들어 모시고 있는데다가, 부처님의 고제자(高弟子)인 아난(阿難) 성자(聖者)가 불전(佛前)에 읍하고 서 있으니, 그 얼마나 신기로운 지세요! 게다가 마을 한복판을 흐르고 있는 냇물의 이름은 백락천(百樂樂)이란 말씀이오. 이를테면 마을 전체가 부처님의 자비로 둘러싸여 있는 셈이니, 그 어찌 지상의 낙원이라고 아니 할 수 있겠소이까. 죄를 짓고 쫓겨 다니던 사람들이 백락촌으로 모여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김삿갓은 무봉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을 들어 보니 그렇기도 하군요. 그러나 석가산이니, 아난봉이니 하는 이름들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 아니고, 근년에 와서 누군가가 적당히 지어 부른 이름이 아닙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무봉은 손을 힘차게 가로 흔든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그 이름들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라오. 그 이름만 보아도 백락촌은 지상의 낙원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김삿갓은 의혹의 고개를 갸울이다가, 문득 또 하나의 의혹이 머리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