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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25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6. 9. 16:32

방랑시인 김삿갓 2-25 회


사태가 그렇게 되고 보니, 김삿갓은 박 서방을 장원으로 뽑은 이유를 분명히 밝혀 둘 필요를 더욱 느꼈다. 그리하여 좌중을 둘러보며 정정 당당하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오늘밤 여러분이 내기를 하게 된 근본 취지는, 어느 지방이 더 추우냐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따지고 본다면 말소리가 얼어붙는 고무산보다는, 촛불이 얼어 붙는 백두산 쪽이 훨씬 더 춥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백두산 선수를 장원으로 결정한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었읍니다.」 

그러자 무봉이 또다시 반기를 들고 나온다.

「뭐가 어째서 고무산보다도 백두산이 더 춥다는 말씀이오?」 

김삿갓은 이왕 내친 김에 당당하게 이렇게 반박하였다.

「무봉 선생은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람이 입으로 뿜어 내는 말소리의 온도는 아무리 높아도 36도를 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촛불의 온도는 4백 도가 넘습니다. 따라서 4백 도나 되는 촛불이 얼어 버리는 백두산의 추위가, 36도의 말소리가 얼어붙는 고무산의 추위보다 훨씬 더 추울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읍니까?」
좌중은 그 말을 듣자,

「과연 삿갓 선생은 귀신 같은 심판관이시오.」

하고 말하며 박수갈채를 보내니 무봉과 사팔뜨기는 그제야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박 서방을 장원으로 뽑게 된 명확한 이유를 듣고 나자, 김삿갓의 지혜로움에 모두들 감탄을 마지않았다. 말소리의 온도가 36도일 것은 분명한데 촛불의 온도는 4백 도나 된다면, 말소리가 얼어붙는 고무산 추위보다도 촛불이 얼어붙는 백두산의 추위가 훨씬 심할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 아니겠는가.

김삿갓이 그와 같은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심판을 공정하게 했노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제는 누구도 불평을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삿갓 선생은 아이들에게 글만 잘 가르치는 줄 알았는데, 이제 알고 보니 세상 물정에 대해서도 도사이시옵니다.」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는 그와 같은 감탄사가 절로 흘러 나올지경이었다.

백락촌 사람들은 모두가 괴퍅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엉큼스러운 점도 없지 않아서, 엔간한 사람은 우습게 보기가 예사다. 

그들은 무봉을 대할 때면, 언제나 <차수 어른 차수 어른!>하고 겉으로는 슬슬 기는 척하지만, 실상인즉 속으로 <네까짓 게 뭔데!>하는 코웃음을 치기가 일쑤였다. 

가령 강서방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날 밤의 모임에 늦게 참석하게 된 것은 염라국에 다녀왔기 때문이었다고 멀쩡한 거짓말을 해가면서, 무봉을 은근히 곯려 주고 있지 않았던가.

그들이 무봉을 농락하는 사건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날 밤 무봉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문득,

「참, 우리 마을에는 대장간이 두 집이나 있는데, 그래도 먹고 날아갈 수가 있는가?」

하고 물어 본 일이 있었다.

자기 딴에는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걱정해 주는 빛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두 명의 대장장이가 무봉에게 똑같이 머리를 숙여 보이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우리 고을에는 대장간이 두 집뿐이어서, 손님들이 사방에서 몰려오기 때문에 먹고 살아가는 데는 별로 걱정이 없사옵니다.」
「음! 그래에? 먹고 살아가기에 걱정이 없다면 다행한 일이로 군그래....... 이러나 저러나 조그만 마을에 대장간이 두 집이나 있어서, 마을 전체가 대장질소리로 너무 시끄럽지 않을까? 이왕이면 마을 사람들이 조용히 살아갈 수 있도록 대장간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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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26 회

자기 딴에는 마을의 공익을 위하는 척하고,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지껄여 본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대장장이들은 고개를 굽실거리며,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차수 어른께서 대장간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분부를 내리시면, 저희들은 대장간을 오늘이라도 옮기도록 하겠읍니다.」

김삿갓은 옆에서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영업장소를 옮기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봉이 명령만 내리면 그대로 시행하겠다는 것은 너무도 뜻밖의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장장이들의 대답을 듣고 놀란 사람은 김삿갓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도 한결같이 놀라 보이며,

「여보게들! 대장간을 옮기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 터인데, 자네들은 그 돈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영업 장소를 옮기겠다는 말인가?」
하고 물어 본다.

그러나 대장장이 맹 서방과 공서방은 무슨 속셈에서인지 빙글빙글 웃기만 하였다.

「차수 어른께서 대장간을 옮기라고 말씀하시니까, 우리로서는 안 옮길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 대신 차수 어른께서 모든 비용을 보상해 주실 거니까, 우리들은 그것만 믿고 명령대로 옮겨 갈 생각이라네.」

대장장이들이 그렇게 나오자 이번에는 무봉 자신이 기절초풍을 하며 놀랄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아!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대장간 옮겨 갈 비용을 나더러 내놓으란 말인가?」
「아니 그럼, 차수 어른은 보조금도 안 주시고, 맨손으로 옮겨 가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대장장이들이 정색을 하고 나오는 바람에, 무봉은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여보게들! 마을 사람들이 조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장간을 먼 곳으로 옮겨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지, 내가 언제 이사 비용을 대주겠노라고 말했단 말인가. 돈이 나올 것을 바라고 대장간을 옮겨 가겠노라고 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네.」
「우리가 대장간을 옮겨 가려는 것은 마을의 공익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향약계의 곗돈 중에서라도 얼마간 보조를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보조금을 향약계에서 내놓으라는 말이 나오자,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개를 흔든다.

「자네들이 대장간 옮겨 가는 보조금을 마을에서 내놓으라는 것 은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사태가 그처럼 점점 확대되어 가자, 무봉은 차라리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만 같지 못했다. 그리하여 얼른 다음과 같은 타협안을 내놓았다.

「자네들이 비용 관계로 대장간을 옮겨 갈 수 없노라면, 그대로 있어도 무방하이. 이사 비용을 보조해 줄 돈은 아무데서도 나올 데가 없으니까 말일세.」

무봉은 거기까지 말하고 그만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잠시 뜸을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나의 의견대로 대장간을 옮겨 주기만 한다면, 보조금은 못 줄망정 내가 술은 한잔 톡톡히 사기로 하겠네. 그것만은 이 자리에서 약속을 해둠세.」

무봉은 적당히 휘갑을 쳐버리고 싶은 마음에서, 그것도 되는대로 씨부려 댄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장장이들은 그 말을 듣고 나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저희끼리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다가, 문득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좋습니다. 차수 어른께서 그처럼 말씀하시니, 저희들은 대장간을 옮기기로 하겠읍니다. 그 대신 술은 톡톡히 사주셔야 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