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29 회
방랑시인 김삿갓 2-29 회
이윽고 네 사람은 한상에 둘러앉아 돼지다리 불고기를 안주로 삼아 가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무봉은 좌중을 둘러보며 호기를 부린다.
「말이야 바른 대로 말이지. 내가 없으면 우리 마을의 질서는 말이 아닐 걸세. 마을이 잘되려면 자네들처럼 어른의 말씀을 잘 들어줘야 하는 법이야」
공 서방과 맹 서방은 머리를 굽실거려 가며, 적당히 맞장구를 친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웁니다. 차수 어른께서 안 계셨으면 우리 마을은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그러기에 어느 마을을 막론하고 어른이 한 사람씩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이야. 이번 일만 해도 자네들이 내 말대로 대장간을 옮겨 주어서, 이제부터는 우리 마을이 얼마나 조용할 것인가.」
그러자 공 서방이라는 자가 김삿갓의 옆구리를 꾹 찌르더니, 귓가에다 대고 이렇게 소근거리는 것이 아닌가.
「삿갓 어른! 우리가 대장간을 옮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을이 시끄럽기는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옵니다.」
너무도 뜻밖의 말에 김삿갓은 어리둥절하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대장간을 옮겨 갔으면 마음이 조용해져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오? 그런데 어째서 시끄럽기는 마찬가질 거란 말이오?」
「.........」
공 서방은 대답을 안 하고 국으로 술만 마시고 있다.
그러니까 김삿갓은 궁금증을 맹 서방에게서 풀어 볼밖에 없었다.
「여보시오. 맹서방! 대장간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면서, 마을이 시끄럽기는 마찬가질 거라는 말은 무슨 소리요? 혹시 당신네들은 대장간을 옮겨 가지도 아니하고, 술을 얻어먹기 위해 멀쩡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맹 서방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아니올시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겠읍니까. 우리 두 사람이 모두 다 대장간을 옮긴 것만은 확실합니다.」
「대장간을 옮겨 간 것이 사실이라면, 마을은 응당 조용해져야 옳을 일이 아니겠느냐 말이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못하게 되었읍니다.」
맹 서방은 무봉의 눈치를 살펴 가며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대장간을 옮겨 갔는데도 불구하고 마을이 조용하지 못하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말이오?」
김삿갓은 무봉을 대신하여 대장간 이동 문제의 진상을 본격적으로 규명해 볼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태도가 처음부터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장간을 옮겨 갔는데도 마을이 조용하지 못하다면 그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이오?」
김삿갓이 꼬치꼬치 파고들 기세를 보이자, 그들은 그제야 약간 당황하는 빛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차수 어른의 분부대로 저희들 두 사람이 모두 다 대장간을 옮긴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데 뭐가 어째서 마을이 시끄럽기는 마찬가질 거라는 말이오?」
김삿갓이 다그쳐 묻자 맹 서방과 공 서방은 저희끼리 얼굴을 마주 보며 잠시 말이 없더니, 문득 공 서방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맹 서방네 대장간은 저의 집으로 옮겨 왔고, 저의 집 대장간은 맹 서방네 집으로 옮겨 간 것이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뭐요? ......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대장간을 바꿨을 뿐이 아니오?」
「이를테면 그런 셈입지요. 맹 서방네는 식구가 많은데 집이 좁았고, 저는 집은 넓은데 식구가 적어서 우리 두 사람은 숫제 집을 바꿔 버린 것입지요. 집을 바꾸다 보니, 집에 딸려 있는 대장간도 절로 옮기게 된 것입지요. 이러나저러나 차수 어른의 말씀대로 우리가 대장간을 옮겨 간 것만은 사실이 아니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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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30 회
자기네의 필요에 따라 집을 교환하고 나서, 무봉한테 술까지 얻어먹으러 온 그들의 얌치에, 김삿갓은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무봉은 그들의 속임수를 그제야 알아채고, 별안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였다. 김삿갓은 맹 서방과 공 서방의 암수에 감쪽같이 속은 일이 분 하다기보다도,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저희들의 편의에 따라 집을 바꾸고 나서, 무봉의 등을 쳐먹기 위해 술과 돼지 다리까지 자기네가 직접 사가지고 온 그들의 후안무치에는 손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봉은 그들에게 골탕을 먹은 것이 어지간히 화가 동하는지 한 동안은 얼굴만 붉으락푸르락 하고 있었다.
무봉의 입에서 금방 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아, 김삿갓은 가슴을 죄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봉은 별안간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바탕 웃고 나더니,
「하하하, 이 사람들아! 자네들이 내 말을 그렇게까지 어렵게 들어주어서 너무도 고맙네. 자네들이 돈 때문에 대장간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는 못했을망정, 내 말을 들어주기 위해 집을 바꾸기까지 했다니,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자네들이 내게 대한 성의를 그만큼 보여 주었으니, 나로서는 그 이상 무슨 말이 있을 것인가.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술을 마음껏 마시게!」
하고 말하며 공 서방과 맹서방에게 새삼스러이 술잔을 내밀어 주는 것이 아닌가.
무봉은 언젠가도 강 서방에게 욕을 당했을 때 한바탕의 웃음으로써 그 자리를 멋들어지게 뒤집어 놓은 일이 있더니, 이날도 그런 수법으로 자신의 위세를 억지로나마 펼쳐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김삿갓은 그러한 광경을 목격하고 무봉의 하해 같은 도량에 머리가 절로 수그러져 올 뿐이었다.
무봉이 모욕을 당하고 나서도 그처럼 대범하고도 대담하게 나오니까, 이제는 공 서방과 맹 서방이 오히려 움츠러들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술을 두어 잔 더 받아 마시고 나더니, 총총히 꽁무니를 빼어 달아나 버렸다.
김삿갓은 무봉과 또 둘이 되자 이렇게 말했다.
「무봉 선생의 하해 같은 도량에는 정말 놀랐읍니다. 그 사람들은 어쩌면 그와 같은 암수를 써서 사람을 곯리려고 했을까요?」
그러자 무봉은 또다시 호탕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맹 서방이나 공 서방 따위는 술잔이나 얻어먹으려고 그런 잔 꾀를 부린 것이니, 내 어찌 그런 쥐새끼 같은 것들을 상대로 화 를 내겠소이까. 모르면 모르되, 그자들은 나에게 골탕을 먹였다 고 지금쯤은 자랑삼아 떠들어대고 있을 것이오. 그러나 두고 보시오. 백락촌 마을 것들은 변 존위 영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언젠가는 나의 충복(忠僕)이 되고 말 것이오.」
「변 존위 영감님 한 분만은 암만해도 자신이 없으신 모양이죠?」
「솔직이 말하거니와, 변 존위만은 나의 손아귀에 들어올 인물이 아닌 걸 어떡하오, 하하하.................」
무봉은 통쾌하게 웃고 나서 술 한 잔을 단숨에 쭈욱 들이켜 버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