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33 회
방랑시인 김삿갓 2-33 회
달이 무척 밝은 어느 날 밤이었다.
이날 밤도 달구경을 하려고 산길을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노라니까, 저 멀리 언덕 위로 옷을 하얗게 차려 입은 아낙네 하나가 걸어 올라가는 것이 숲 사이로 가물가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 아낙네가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이런 산중에 혼자 올라오고 있는 것일까?)
혹시 유령이 아닌가 싶어, 김삿갓은 일순간 등골이 오싹해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려 오는 것으로 보아 유령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였다.
여인이 유령이 아니라 사람임을 확인하고 나자, 김삿갓은 일종의 호기심에서 여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여인은 무슨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지, 산길을 부지런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해월정에 올라서더니 그곳에서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너무도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해요. ............아이 숨차!」
하고 소곤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어도, 늙수룩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다.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감정처럼 즐거운 감정은 없는 것이야. 빨리 올라오느라고 숨이 무척 가쁜 모양이구먼? 어서 이리와 앉아요.」
두 남녀는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이 확실해 보였다. 김삿갓은 적당한 위치에서 몸을 숨기고, 정자 위에 앉아 있는 한 쌍의 남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음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달빛이 숲에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으나 젊은 아낙네와 정답게 마주 앉아 있는 남자는, 속인이 아닌 노승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치렀던 저의 집 양반 사십구 일 재(齋) 때에는 스님께서 너무도 친절하게 보살펴 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르겠어요.」
여인이 그렇게 말하자 중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대의 일을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 주겠는가. 그대의 일이 즉 나의 일이니, 앞으로도 어렵게 생각지 말고 나를 자주 찾아오라구.」
하고 말한다.
「스님께서 그처럼 말씀해 주시니 정말 고마우세요......... 그런데 오늘밤은 무슨 일로 저를 여기까지 오라고 하셨읍니까.」
「그대가 무척 외로워 보이기에, 내가 이렇게 위로를 해주려고 만나자고 한 것이 아닌가!」
중은 그렇게 말하며 대는 여인을 부둥켜안고 입이라도 맞추는지,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한참이나 후에야 숨을 내쉬며 말 한다.
「스님들은 여자를 모른다고 했는데, 스님만은 여자를 잘 알고 계시는가보네요..」
그러자 노승이 대답한다.
「무슨 소리! 많은 신도들에게 자비(慈悲)를 베풀어야 하는 내가 여자를 몰라 되는가. 옛날에 석가여래의 고제자였던 아난은 마등(摩登)이라는 음녀(淫女)와 수없이 정을 통해 왔는데, 아난은 중이 아니며 마등은 계집이 아니더란 말인가?」
한다는 소리가 괴상망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인은 짐짓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기도 하네요. 그러면 스님은 남녀간의 재미를 속인들처럼 살살이 알고 계시다는 말씀인가요?」
하고 교묘한 화술로 사내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늙은 중은 음흉스럽기 짝이 없어 여인을 송두리째 부둥켜 안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내가 여자를 얼마나 잘 아는가를 그대에게 실증을 보여 주면 될 게 아닌가.」
그리고 중은 여인의 손에 신물(神物)을 직접 쥐어 주기라도 하는지, 여인은 별안간 소스라치게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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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34 회
「어마! 스님은 누구를 죽이려고 이런 참나무 방망이를 다리 사이에 숨겨 가지고 다니세요?」
그 사내놈에 그 계집년이라고나 할까. 계집년의 수작도 보통이 아니었다. 서방이 죽은 지 두 달도 못되어 한밤중에 깊은 산속으로 중을 만나러 올라올 정도이고 보니, 그녀의 행실은 <가루지기 타령)이라는 고대 소설에 나오는 변강쇠의 마누라와 조금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젊은 계집의 앙큼스러운 수작을 듣는 순간, 옛날에 읽어 본 가루지기 타령이라는 고대 소설의 한 장면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천하의 잡년이었던 변강쇠 마누라는 서방의 신물을 어루만져 보며 다음과 같이 익살스러운 사실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히도 생겼네. 전배사령(前陪使令)을 서려는지, 쌍걸랑을 늦게 차고, 오군문군노(五軍門軍퍼奴)련가 복떠기를 붉게 쓰고, 냇물가의 방아인지 떨구덩 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철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들었는지 맑은 코는 무 슨 일꼬.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게웠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장이 궁기 그저 있다. 뒷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구나. 소년 인사 배웠는지 꼬박꼬박 절을 하네. 고추 찧던 절굿 댄지 검붉기는 무슨 일꼬. 칠팔 월 알밤인지 두 쪽 한데 붙어 있다.>
천하의 잡년이었던 변강쇠의 마누라는 서방의 신물을 어루만지며 그와 같이 해괴한 사설을 익살맞게 늘어놓았으나, 이 젊은 여인은 그만한 말재주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신물을 어루만질수록 믿음직스러운 실감이 나는지,
「도대체 이 방망이의 이름을 뭐라고 하옵니까?」
하고 묻는다.
이에 늙은 중은 콧노래를 내어 가며 이렇게 뇌까리는 것이 아닌가.
「이 방망이로 말하면 만천하의 여인들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생살 여의봉(生殺如意棒)>이라고 하느니라. 선가에는 극락세계가 있으니, 모든 여자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물건이 바로 이 생살여의봉이라는 걸 알아야 하는 거야!」
그러자 여인은 별안간 새침하니 토라져 보이며, 노승을 호되게 나무란다.
「스님은 이 물건으로 모든 여성들을 극락 세계로 인도하셨읍니다. 이 물건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여성들을 위한 물건이라면, 저는 죽어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아니하옵니다.」
여인은 갑작스럽게 질투심이 솟구쳐 올라, 노승을 매정스럽게 믿어 붙이는 모양이었다.
이에 노승은 자신의 실언에 크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노승은 자기 판에는 흥에 겨워서 지난날의 행실을 무심중에 노출시켜 버린 셈이었는데, 그로 인해 눈앞의 여인에게 책을 잡힐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노승은 젊은 여인을 왁살스럽게 끌어당겨 정열적으로 품어 안으며 이렇게 뇌까리 대었다.
「중생이 천만이라도 인연은 제각기 따로 있는 법. 나룻배를 타고 강을 함께 건넜다고 해서 모두가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은 아니야. 나는 봉(鳳)이요. 그대는 황(凰)이 아닌가. 자고로 붕과 황은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인연임을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도 모르는가. 내 이제 우리 두 사람은 삼성(三生)의 인연임을 그대에게 실증으로 보여 주리라.」
그리고 늙은 중은 여인을 마루바닥에 깔아 눕히고 실력 행사를 하는지 여인은
별안간,
「으흐」
하고 외마디 감탄사를 지르더니 잠시 후에는 콧소리로,
「스님은 사람을 죽이시네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스님인 줄 알았는데, 스님은 사람을 이렇게도 죽게 만드시니 이 무슨 일이오이까?」
하고 앙탈이 아닌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