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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42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6. 19. 14:49

방랑시인 김삿갓 2-42 회

사람과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이해 관계로 반드시 상충(相衝)이 생기게 마련이다. 가령 비근한 예로 무봉과 봉녀와 김삿갓의 경우를 두고 보더라도, 세 사람은 모두가 인간인 까닭에 이해와 애증을 완전히 초월하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서로간에 얽혀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자연 사이에는 그와 같은 계루 (繫累)가 일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연을 대하면 즐겁기만 한 것이다.

어느 날 김삿갓은 저녁밥을 먹기가 무섭게 해월정에 올라가, 오랫동안 달구경을 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서당에 내려왔다. 그리하여 옛날 시집을 읽기 시작하였다.

옛날 사람들도 자연을 좋아하기는 김삿갓과 다름이 없었던지, 청헌(淸軒) 석지영(石之榮)이라는 시인은 <산행(山行)>이라는 시 속에서 자연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저물도록 사람은 한 명도 못 만나고 
구름 저쪽에서 풍경소리만 들려 오네 
산은 춥고 가을은 이미 저물었는데 
단풍 든 낙엽이 산길을 덮는구나. 

斜日不逢人 (사일부봉인)
徹雲遙寺磬 (철운요사경)
山寒秋己盡 (산한추기진)
黃葉覆樵路 (화엽복초로)

김삿갓은 그 시를 자꾸만 외어 보고 있노라니까, 어느덧 자기 자신이 깊은 산속을 혼자 거닐고 있는 듯이 그윽한 느낌조차 들었다. 

김삿갓은 산을 혼자 거니는 것도 즐거웠지만, 산수를 노래한 시를 읽는 것은 그지없는 즐거움이었다.

그리하여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시 삼매경 (三昧境)에 잠겨 있노라니까, 문득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무봉이 술병을 들고 방안으로 불쑥 들어서면서,

「삿갓 선생은 이즈음 어디를 그렇게 밤늦게까지 나다니시오? 혹시 어떤 과부댁과 바람이 나신 것은 아니오?」

하고 너스레를 치는 것이 아닌가.

「어서 들어오십시오. 이 밤중에 웬 술을 가지고 오십니까?」

무봉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술병을 눈앞에 들어 보이며, 

「이 술로 말하면 일전에 유종 때문에 나를 찾아왔던 젊은 환자 내외가 있지 않았소? 그들은 내가 알려 준 대로 치료했더니, 유종이 깨끗이 나았다고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로 이 술을 들고 왔더란 말이오. 그러니 내가 어찌 이 술을 혼자 먹을 수가 있겠소. 삿갓 선생과 같이 나누려고 가지고 왔다우.」

김삿갓은 그렇게도 험상궂던 유종이 깨끗이 나았다는 말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

「아, 그래요? 병이 깨끗이 나아서 남편 되는 사람이 감사하다는 술을 들고 왔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러고 보면 무봉 선생의 의술은 보통이 아니신 모양입니다.」
「삿갓 선생은 무슨 실례의 말씀을 하고 계시오. 자고로 성인이 능지성인(聖人能知聖人)이라고, 무식한 사람은 명의를 알아보지 못하는 법이에요. 이제나마 나의 명술을 알아주셨다니, 만시지탄 (晩時之歎)은 있으나 그런대로 불행 중 다행이외다. 자, 그런 의미 에서 한잔 합시다.」

무봉은 농담을 섞어 가며 한동안 술을 나누다가, 문득 정색을 하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삿갓 선생은 요새 바람이 나신 모양인데, 상대방 여자는 어떤 과부요?」

김삿갓은 무봉의 질문을 받고 기가 막혔다.

「내가 바람이 나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오?」

무봉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웃어 보이며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요. 선생은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만은 못 속인다는 것을 아세요.」
「다 알고 계시다면서 새삼스러이 물어 보시기는 왜 물어 보십니까」

김삿갓은 굳이 변명하고 싶지 않아 심드렁하게 대답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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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43 회

무봉은 잠시 머쓱해졌다가,

「선생이 어떤 과부와 배가 맞아 돌아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 과부가 누구라는 것만은 아직 알지 못해요. 선생은 지금이라도 나에게 모든 것을 이실직고해 주시오. 그러면 내가 중간에 나서서 월하빙인(月下氷人)이 되어 드릴 용의가 있으 니까 말이오.」

하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점점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선생은 누구한테서 무슨 말을 듣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건 왜 물어 보시오. 아무도 모르는 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씨를 터뜨려 놓으니까 켕기시는 모양이구료? 하하하.」

무봉은 어디까지나 뒤집어씌우는 수법으로 나온다. 그러나 김삿갓은 태연자약하게 술만 마셨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거나, 마음이 켕기기는커녕 가렵지도 않습니다. 그런 시시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십시다.」

김삿갓이 끝끝내 초연한 태도로 나오니까, 무봉은 적이 무안한 빛을 보이다가 다시 역습을 시도한다.

「그러면 선생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올 수 있다는 말씀 인가요?」
「누가 무슨 소문을 퍼뜨렸거나, 나는 그런 소문에는 개의할 필요조차 없읍니다. 설사 내가 남의 집 과부와 정분이 났기로, 그게 뭐가 나쁘다는 말씀입니까.」

김삿갓이 그렇게까지 도도하게 나오니까 무봉은 불안한 기색이 농후해지더니,

「허기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닐는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말하다가 별안간 생각 난 것처럼,

「참, 내 누이동생이 지금 삿갓 선생한테 선사할 솜옷을 짓고 있는 모양입니다. 삿갓 선생은 그런 줄이나 알고 계세요」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무봉은 솜옷 얘기를 댓바람에 끄집어내기가 거북스러워 바람을 키우느니 어쩌니 하고 허튼수작을 한바탕 늘어 놀랐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무봉은 김삿갓에게 훈장 감투를 억지로 뒤집어씌웠던 것과 똑같은 수법으로, 김 향수가 죽고 나면 이번에는 봉녀를 김삿갓 결합시켜 보려고 벌써부터 갖은 수법을 써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김삿갓은 누가 무슨 소리를 하거나 백락촌에 언제까지나 눌러 있을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훈장 자리를 맡아 줄 사람이 없어서 부득이 늑장을 부리고 있을 뿐이지, 적당한 후임자가 나서면 그날로 백락촌을 떠나 버릴 생각이었다.

따라서 김 향수가 죽어 버리면 무봉의 누이동생인 봉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봉은 원모 심려(遠謀深慮)라고나 할까. 먼 장래를 생각해 지금부터 그런 일을 꾸미고 있는 모양이니, 김삿갓은 도무지 마땅치가 않았다.

「무봉 선생!」

김삿갓은 정색을 하고 무봉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삿갓 선생은 별안간 왜 정색을 하시오?」
「이왕 말이 난 김에, 무봉 선생한테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려 둘 일이 있읍니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을 해보시오.」
「무봉 선생은 지금 매씨께서 나를 위해 솜옷을 짓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남녀간의 도의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봉녀 여사는 어엿한 유부녀인데다가 나는 처자식이 있는 유처남(有妻男)이올시다. 그런데 남편 있는 여자가 어떻게 외방 남자의 옷을 지어 줄 수 있겠읍니까.」

그러자 무봉은 그 특유의 너털웃음을 웃어 가면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