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58-1 회
방랑시인 김삿갓 2-58-1 회
첫째, 자기가 백락촌 사람들을 맘대로 휘어잡으려면 김삿갓 같이 머리 좋은 조언자가 한 사람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둘째, 멀지않아 김 향수가 죽고 나면 누이동생을 김삿갓에게 떠넘기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세째, 김 향수가 죽고 나면 유산 분배 관계로 유족들간에 분쟁이 일어날 것이 뻔한 일이므로, 그런 경우에는 김삿갓을 중재자로 내세워 누이동생에게 유리하게 처리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네째, 김삿갓은 욕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므로 후일에 백락촌의 모든 실무를 그에게 대행시키고 자기는 노후를 편히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다섯째, 《삼국 지(三國志)》에 나오는 유현덕 (劉德)에게는 제갈공명 (諸葛孔明)이 라는 충신모사(忠謀士)가 있었듯, 무봉 자신에게도 지혜로운 심복이 꼭 한 사람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물론 제갈공명이 유현덕에게 심혈을 기울여 충성을 다하듯, 김 삿갓이 지금 당장 심복이 되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봉은 그 점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 향수가 죽은 뒤에 누이동생과 부부관계를 맺어 놓으면, 제아무리 김삿갓이기로 이불 속의 호소를 어찌 거역할 수 있을 것인가 싶기 때문이었다.
무봉은 그 모양으로 먼 장래까지 내다보며, 김삿갓을 심복으로 만들 계획을 착착 진행시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무봉이 그러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줄도 모르고, 백락촌을 하루속히 떠나 버리고 싶은 마음에서 사방으로 수소문을 놓아, 후임자를 열심히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골에는 선비가 워낙 귀하여, 후임자가 좀처럼 나타나 주지 않았다.
이렁저렁하는 동안에 겨울이 길어. 날씨가 자꾸만 추워 오고 있었다.
(에라 날씨도 춥고 후임자도 없고 하니, 거울을 여기서 나고 봄이 되거든 떠나기로 하자.)
김삿갓은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함박눈이 펄펄 날아 내리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김삿갓은 눈 오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산속을 정처없이 혼자 헤매고 있었다.
산골짜기에는 어느새 눈이 내리쌓여, 발을 옮겨 놓을 때마다 발밑에서는 빠드득 빠드득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울려 오고 있었다.
「아아, 눈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좋은 것이었구나!」
김삿갓은 하도 즐거워 산속을 정신없이 배회하고 있노라니 저멀리 눈 속에서 나그네 하나가 나타나더니,
「혹시 이 부근에 자고 갈 만한 서당이 없겠읍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혼자 심심하던 판인지라, 생면 부지의 나그네를 반갑게 맞았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잠자리를 구하신다구요? 이 산밑에 공맹재라는 서당이 있는데, 제가 바로 그 서당의 훈장이올시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고맙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데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떡하나 싶었더니, 마침 잠자리를 제공해 주신다니 여간 고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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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59 회
나그네는 김삿갓을 따라 내려오면서 고개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이는 것이었다. 나그네의 나이는 사십 세 가량 되었을까, 의관을 단정하게 갖춘 품이 첫눈에 보아도 선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어디를 가시는 길인지, 몹시 늦으셨읍니다.」
「안변에 계신 어머님을 뵈러 가는 길인데, 중도에서 길을 잘못 들어 저물게 되었읍니다.」
이윽고 서당에 내려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김삿갓은 저녁을 지어 주려 하였다. 그러자 나그네는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말한다.
「집에서 가지고 떠난 도시락을 조금 전에 막 먹어서 배가 부르옵니다. 저녁 걱정은 마시고 하룻밤 재워만 주십시오.」
「그래도 저녁을 굶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사양이 아니옵고, 배가 불러 아무것도 못 먹겠읍니다.」
「정말로 그러시다면 술이라도 한잔 나누십시다.」
김삿갓은 나그네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속으로,
(나의 후임자로 이 사람을 모셔 오도록 교섭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자 공맹재와 자기 자신의 실정을 소상하게 말해 주면서,
「매우 어려운 부탁이오나, 이 서당을 좀 맡아 주실 수 없겠읍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나그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인데 어찌 이곳에 머무를 수 있으오리까.」
「그러지 마시고 서당을 꼭 좀 맡아 주시옵소서.」
「암만해도 내일은 떠나야 합니다.」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와서 못 떠나시옵니다.」
그 모양으로 김삿갓은 나그네를 붙잡아 두려고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연방 술을 권해 오다가, 문득 눈 오는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지었다.
날리는 눈송이는 춘삼월 나비 같고
밟으면 발 밑에서 개구리 소리 나네
추워서 못 가신다고 눈을 핑계대머
혹시나 머무를까 다시 술잔을 권하오.
飛來片片三月蝶 (비래편편삼월접)
踏去聲聲六月蛙 (답거성성유월와)
寒將不去多言雪 (한장불거다언설)
醉或以留更進盃 (취혹이유갱진배)
김삿갓은 즉석에서 휘갈긴 시를 말없이 나그네에게 내밀어 보였다.
나그네는 김삿갓의 시를 받아 들고 오랫동안 감상하더니, 문득 옷깃을 바로잡으며 이렇게 감탄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