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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62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7. 1. 14:20

방랑시인 김삿갓 2-62 회

그러나 무봉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또 다른 오해를 한다.

(하하, 김 함수가 죽거든 누이동생을 맡아 달라고 했더니. 이 친구는 김 향수가 빨리 죽기를 몹시 고대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서당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겠다고 말한 것은 멀쩡한 엄포가 아닌가?)

무봉은 자기 나름대로 그런 생각이 들자, 고개를 거듭 끄덕이며 말한다.

「삿갓 선생이 조급하게 여기는 심정은 알만도 하오. 그러나 모든 일은 멀잖아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니 선생은 나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무봉이 말하는 원만한 해결이란, 김 향수가 멀지 않아 죽게 될 것이니까. 그가 죽고 나거든 봉녀와의 결합을 원만하게 해결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술이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관계로 원만하게 해결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김시춘의 문제 인줄로 잘못 알고 머리까지 수크러 보이며,

「무봉 선생! 꼭 부탁입니다. 이 문제만은 되도록 빨리 해결해 주도록 하시옵소
서.」
하고 간곡한 부탁까지 하였다.

무봉은 김삿갓에게 술을 권하며 다시 말한다.

「글쎄 알았다니까 그러네요. 그 문제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요 삿갓 선생이 그렇게도 소원이라면, 내가 비상 수단을 써서라도 신속히 해결해 드릴 테니까 나만 믿어요」
「고맙습니다. 그러면 무봉 선생을 믿고 안심하고 술을 마시겠읍니다.」

이리하여 이날 밤 두 사람은 제각기 엉뚱한 기대를 가지고 술을 마구 퍼마셨다.

그렇게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나도 무봉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말이 없지 않은가.

날씨가 나날이 따뜻해 와서 방랑의 길에 오르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은데, 무봉은 훈장 문제에 대해 일체 말이 없지 않은가.

김삿갓은 기다리다 못해 어느 날은 무봉을 일부러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무봉 선생! 그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겁니까.」

그 일이란 말할 것도 없이 훈장 문제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무봉은 김 향수가 언제쯤 죽게 되느냐고 물어 보는 줄로 지레 짐작하고,

「그 일이라면 며칠만 더 기다려요. 향수 어른이 돌아가실 날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까요.」

하고 말한다.

「향수 어른이 꼭 돌아가셔야만 합니까. 그 어른이 돌아가시기 전에라도 어떻게 안 되겠읍니까.」

김삿갓은 어디까지나 훈장 문제를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봉은 누이동생에 관한 일인 줄만 알고,

「그렇게도 급하시오?」 하고 묻는다.
「별로 급할 것은 없지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빨리 해결을 지어 버리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그래요? 그럼 알았어요. 그렇잖아도 내가 지금 비상 수단을 쓰고 있는 중이니까, 얼마 후에는 결말이 나게 될 거요. 그러나 삿갓 선생이 그렇게도 급하시다면 하루 이틀만 더 기다려 주시오. 그 사이에 내가 어떡하든지 일을 꾸며 보도록 하겠소.」 

그리고 헤어진 바로 그 다음날 밤의 일이었다.

김삿갓이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불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로,

「삿갓 선생님!」

하고 몸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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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63 회


김삿갓은 자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며,

「누구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불 속의 여인은 일어나려는 김삿갓의 몸을 짓눌러 버리며 침착한 어조로,

「삿갓 선생님, 놀라지 마세요. 저예요.」
「저가 누구요?」
「무봉의 누이동생 봉녀예요.」
「엣 봉녀 여사?」

김삿갓은 다시 한번 놀라며,

「봉녀 여사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소?」
그러면서 깨닫고 보니 봉녀의 몸은 실오리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가 아닌가. 젊은 여인이 알몸뚱이로 누워 있는 탓인지, 이불 속에서는 향기로운 지분 냄새가 정신을 황홀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봉녀는 김삿갓의 팔을 힘주어 움켜잡으며 호소하듯 속삭인다. 

「오라버니께서 오늘밤 삿갓 선생을 모시라는 말씀이 계셔서 체면없이 이렇게 모시려 온 것입니다.」
「뭐요? 무봉이 나를 모시라고 해서 왔다구요?」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저는 오래 전부터 삿갓 선생을 사모하고 있었읍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당신한테는 김 향수가 있는데 이럴 수가 있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삿갓은 젊은 여인의 육체가 몸에 접촉되는 순간부터 전신이 후끈 달아오르는 본능적인 욕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

여인은 김삿갓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이 없었다. 그제야 깨닫고 보니, 여인은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여인이 울고 있음을 깨닫자, 김삿갓은 별안간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울기는 왜 우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얘기를 좀 들어 봅시다.」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울음 섞인 음성으로 호소하듯 말한다.

「김 향수는 명색이 영감님일 뿐이지, 저한테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 양반이 처음부터 싫었지만, 오라버니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 집에 들어갔던 거예요.」 
「싫으면 처음부터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일이지, 이제 와서 그린 소리를 하면 어떡하오?」

김삿갓은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의식적으로 꾸짖어 보였다.
그러자 여인은 어깨가 들먹거리도록 울어 쌓다가, 문득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철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삿갓 선생을 알고 나서부터 제 생각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어요.」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다니, 뭐가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오?」

김삿갓은 그렇게 반문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인의 등을 정답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인은 김삿갓의 팔을 두 손으로 힘주어 움켜잡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철이 없을 때에는 돈만 많으면 인생을 얼마든지 행복스럽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정작 그 처지가 되고 보니 인생이란 돈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은 옳게 생각했구료. 인생이란 어디 돈만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건가요?」
「저는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체면 불고하고 이렇게 삿갓 선생님을 찾아오게 된 것이에요. 오라버니께서 삿갓 선생을 모시라는 말씀도 계셨지만, 오라버니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저는 언젠가 는 삿갓 선생님을 반드시 찾아왔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