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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論,少論,南人, 北人! 조선 중-

이종육[소 운(素 雲)] 2024. 6. 23. 14:18

"老論,少論,南人, 北人! 조선 중-
후기의 4색 당파입니다-요약 설명"

4색 당파/당쟁은 어느정도 알고 있어도,
제대로 알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별로 없다고 봅니다.

이제 어느정도 공부가 끝나서
그것에 대해서 쉽게 정리를 해볼까 합니다~

1. 훈구파(勳舊파/ 훈 : 훈장 훈 / 구 : 옛날 구)

조선 초기에 조선 창업에 협력하고,
각종 쿠테타를 이끈 공신들이 권력을
잡은 파벌을 말한다.

즉, 태종이 형제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것이나,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과
형제를 죽이고 왕 세조가 된 것에
도움을 주고 쿠테타에 같이 가담한
공신들의 권력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공신으로 등극이 되고,
권력과 부(토지와 재물) 그리고 여자 등을
하사 받았다.

이들이 초기 조선시대 권력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들을 훈구파라고 한다.

2. 사림파(士林파/ 사 : 선비 사 / 림 : 숲 림)

고려말에 고려를 못버리고, 조선 개국에
동조하지 않은 유학자층으로,
고려말과 조선초에는 지방으로 낙향하여
지방에서 토호(지방권력)로 힘을 쌓았다.

이들이 조선 초부터 다시 조선정치에
조금씩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위의 훈구파에 비해서, 이론적이고
논리적이고 명분(형식)이 강했다.
즉, 쉬운말로 , 좋게 말하면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사람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하고 탁상공론적이었다.

3. 사화(士禍/ 사 : 선비 사 / 화 : 재앙 화)

조선 초기(보통 연산군부터) 기득권인
훈구파와 신진인 사림파간의 대립에서,
사림파 선비들이 대량 학살당한 사건을
사화라고 한다.

4. 사림파의 승리 ! ==> 4색 당파/당쟁의
시작 !

선조때부터는 사림파가 완전히 승리하여,
정권을 잡게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여년전의 일이다.

이때부터 훈구파는 다 멸되고, 정권을 잡은
사림파간에 대립이 시작이 되는데 ,
이를 당쟁이라고 한다 !

5. 동인 vs 서인

사림파의 첫 분열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진다.

동인은 주세력이 동대문에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서인은 주세력이 정릉에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동인은 서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젊고,
원칙적이었다. 상대적 약자였다.

동인의 영수는 퇴계 이황이고,
서인의 영수는 율곡 이이이다.
/ 단 율곡은 사실은 중립이었는데,
원칙적이고 이론적인 동인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무조건 서인으로 간주가 되었다.
동인은 자기 편이 아니면 다 적이라는
식이었다.

퇴계 이황은 1천원에 인물이고,
율곡 이이는 5천원권 인물이고,
5만원 인물인 신사임당은 이이의 엄마이다.

6. 첫 사림파 정권 = 동인

선조때 첫 사림파 정권은 동인이 차지한다.
그러나 정여립 사건으로 동인은 화를 당하고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긴다.

정여립 반란사건은 서인의 모함/조작이라는
설도 있다. 어째든 동인은 이 사건으로
다수가 죽음을 당하는데, 이때 서인의
영수가 바로 송강 정철이다.

7. 서인의 패배와 동인의 응징 & 분열~

몇년후, 정권을 잡았던 송강 정철의 서인은
다시 화를 당하고 정권을 빼앗긴다.
빼앗긴 이유는, 송강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삼을 것을 요청했기 때문에,
선조의 괘씸죄로 서인은 화를 당하고
정권을 빼앗긴다.

이때 다시 권력을 잡은 동인은,
서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데,
서인을 다 죽여버리자는
강경파는 북인이 되었고,
핵심 몇몇만 죽이고 대충하자는
온건파는 남인이 된다.

즉, 동인이 서인에 대한 보복의 강도로,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북인의 영수는 이산해였고,
남인의 영수는 유성룡이었다.

8. 임진왜란과 북인정권 !

임진왜란에 가장 적극적으로 일본과 싸운
파벌이 바로 북인이었다.
유명 의병장도 북인이 많다.
즉, 북인은 임진왜란의 가장 큰 공훈이
있는 정파였고, 결국 광해군과 함께 정권을
잡는다 !

9. 인조쿠테타와 북인의 궤멸 !

인조쿠테타가 일어나서 광해군과 북인정권을
망하고 만다.
이때 쿠테타 세력은 서인과 남인의
연합정권인데, 서인이 70~80%이고,
남인이 20~30%정도의 실질적으로
서인이 주력인 인조정권이었다.

인조반정 1년만에 쿠테타 공신이었던
이괄의 난으로 수도 한양이 일시적으로
함락이 되기도 하는데, 이때 서인들은
충청도 공주로 도망가기전에 서울에 있던
나머지 북인들을 다 죽여버린다.
즉, 북인은 이때 완전히 궤멸된다.

10. 서인정권의 장기집권 !

인조때부터 효종,현종, 숙종초기까지
서인정권을 몇십년을 장기집권을 한다.

11. 남인정권의 탄생 !

숙종때 남인 정권이 5년정도 탄생한다.
그 배경에는, 장희빈이 있다.
즉, 통역관이자 상인이었던 장희빈의
집안은 지금으로 말하면 청나라와
교역을 하는 대기업 재벌집안(삼성과 비슷한)
이었는데, 장희빈은 그런 집안의
첩의 딸(기생의 딸, 세컨드의 딸)로 태어났다.

이 장희빈의 집안이 남인과 인연이 있었는데,
궁녀였던 장희빈이 숙종의 아들을 낳자,
남인은 장희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고,
장희빈-남인 정권이 5년정도 숙종때에
집권을 한다.
장기 서인 정권이 붕괴되던 시기였다.

12. 장희빈(남인)이 숙종의 아들을 낳고,
정권을 잡은 이유는 ?

숙종의 정부인이었떤 2명의 여자는
아들을 다 낳지 못했다.
특히 1째부인은 20세에 병으로 죽었고,
2째부인은 아예 애를 낳지 못했는데,
그가 바로 인현왕후 이다.

그런데, 숙종의 2명의 정부인은
다 서인명문가의 집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5년간 아들이 없던
숙종에게 첫아들을 낳아준 이가
바로 장희빈-남인이었떤 것이다.

장희빈-남인은 정권을 잡고, 물론 서인들을
많이 죽이고, 특히 정부인이었던 인현왕후도
폐위시켜버린다.

13. 남인 몰락 ! 서인재집권 & 서인의 분열 !

남인은 정권 5년만에 다시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긴다.

이때 정권을 잡은 서인은,
다시 복수를 다짐하는데,
남인을 다 죽이자는 강경파 노론과
핵심만 죽이고 적당히 하자는 온경파
소론으로, 서인도 갈리게 된다.

노론(老 : 늙은 노) / 소론(少 : 젊을 소) :
상대적으로 소론이 젊은층이었다고 합니다.

14. 노론과 소론의 대결 !

숙종은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장희빈의 아들(후의 경종)로 ,
소론이 지지를 하고,

둘째 아들은 최무수리의 아들(후의 영조)로,
노론이 지지를 한다.

장희빈과 최무수리는 다 궁녀출신이었다.
즉 신분이 중인과 평민출신이었따.

숙종은 죽기 몇년전에, 장희빈 아들보다는
최무수리 아들을 왕위로 하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만다.
즉, 세자였던 장희빈의 아들이 경종으로
즉위한다.

15. 경종 독살설과 사실상의 영조쿠테타 !

경종은 4년만에 죽고마는데,
원래 병약한 것도 있었지만,
배다른 동생 영조의 독살설도 있다.

경종이 즉위 1년만에, 노론과 영조 그리고
숙종의 남은 부인은, 경종을 몰아내기로
합의하고, 영조(연잉군)를 세자로 임명하고,
대리청정을 시킨다.
사실상의 쿠테타였다.
배다른 동생이 형을 밀어낸 사실상의 쿠테타 ! ==>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시 권력의 핵심은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고,
특히 숙종의 부인이자 경종과 영조의
계모(법적인 엄마)인 , 숙종의 부인도
영조를 지지했고, 그녀도 노론이었기
때문이었다.

16. 영조는 왜 탕평책을 썼나 ?

영조가 자신을 왕으로 만든 노론뿐만 아니라,
영조의 배다른 형인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도 크게 벌주지 않고 탕평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

영조가 소론 온건파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경종 초기에 경종은, 배다른 동생
영조를 죽을 수 있는 상황까지 오게되는데
;쿠테타 혐의로), 이때 영조를 죽지 않게
도움을 준 이들이 바로 소론 온건파들이다.

물론 소론 강경파는 영조도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소론 온건파는 그것은 안된다고 했다.

결국, 배다른 형 경종은, 영조는 살려둔다 !
그리고 몇년 후 병 or 독살로 경종은 죽는다.

이때 영조는 소론 온건파에 의해서
살아남았고, 이 인연으로 영조가 즉위한
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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