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 은 글

도둑질/정양

이종육[소 운(素 雲)] 2024. 7. 1. 16:27

도둑질/정양




외동딸 시집보내고 혼자 사는
여산댁 외딴집에 도둑이 들었다
안방문 소리 없이 따고 들어온
어두운 붉은 손전등 불빛이 안방 벽장문
문고리 어름에 어른거릴 때
아까부터 숨죽여 지켜보던 여산댁이
"도독이야 도독이야"
연거퍼 큰 소리로 내질렀다
"하따, 간 떠러지거따 이녀나"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떨어드린 도둑이
손바닥으로 여산댁 입부터 막으려 한다
"어따대고 년짜냐 이 도동노마 너 멧살 처머건냐?"
"이 판국에 나이가 무슨 개뼉다구냐 이녀나"
야무진 몸으로 여산댁을 짓누르며 목을 조르려 든다
"확 쥑여뻐리는 수도 이씅게 꼼짝마러 이녀나"
"그려 확 쥑여뻐려라 쥑여뻐려 이 도동노마"
옥신각신 짓누르는 덩치를 손발로 밀쳐내다가
얼핏설핏 도둑의 거시기가 손에 닿기도 한다
"아니, 이년이 환장혔능개비네 거그가 시방 어디라고 더듬능 거시여 더듬기를"
"오매 환장허건네 더듬기는 누가 더듬어 이 도동노마 지꺼시 뻐뻣허징게 자꾸 소네 단능구만......"
말 마치기도 전에 부르르 떨던 여산댁 몸이
한꺼번에 허물어진다 도둑도 말없이
여산댁 허물어진 몸을 속속들이 챙긴다
거친 숨 섞인 허물어진 몸소리들 잦아들고
입지도 벗지도 않은 채 맞붙은 몸들이
버려져 뒹구는 손전등 불빛에 얼비친다
숨가쁘던 방이 한동안 고요에 잠긴다
"나 오널 도독질은 그만둘란다"
년짜 빠진 도둑의 말투가 사뭇 부드럽다
"씹도독질은 도독질 아니냐? 이 도동노마"
도동노마를 달긴 했어도 여산댁 말투에도
허물어지던 몸소리가 아직 묻어 있다
"도독질 당헐라고 잔뜩 지둘려떵만 뭔 딴소리여?"
"그려, 사내맛 본 지 오래 되어따 이 날도동노마"
"암만혀도 그 도독질 한 번 더 혀야 쓰거따"
몸 허물어지는 소리들이 한바탕 더
외딴집 새벽을 휩쓸고 지나갔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도둑이
그림자처럼 싸립문을 빠져나가고
다 알고 있다는 듯 닭장에서 훼를 치며
유난히 길게 목청을 뽑는 첫닭이 운다
아직껏 입지도 벗지도 않은 여산댁이
도둑이 사라진 싸립문을 건너다보며 중얼거린다
"오너른 내가 나 아닌 건만 가트다 아니
오너른 내가 참말로 나 가트다 이 도동노마"
정양 시집 <암시랑토앙케> 중






Daum 메일앱에서 보냈습니다.

'좋 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극배우 "밥 호프"와 삶  (0) 2024.07.01
水到渠成(수도거성)  (0) 2024.07.01
사람의 품위(品位)  (0) 2024.07.01
天國은 어디에 ?  (0) 2024.06.30
🙏득 도🙏  (0) 2024.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