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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난 시 한편이 있어 올립니다.♧

이종육[소 운(素 雲)] 2024. 8. 22. 14:46

♧ 재미난 시 한편이 있어 올립니다.♧

🌻 충남고교 여교사 이정록 시인이 쓴 "정말"이란 시 인데, 남편과 일찍 사별(死別)한  슬픔을 역설적이고,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했지만 읽다보면 마음이 짠~ 해지는,
전혀 외설스럽지 않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
  "정 말"
        - 이 정 록 -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아랫도리로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수욱~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초 조루증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니였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ㅡㅡㅡㅡㅡㅡㅡㅡ
<조정현 評>

 [이정록(1964~) 시집 '정말' 중에서]

이 시 참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1연에서는 일찍 저세상으로 간 신랑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돌아가신 남편이 성격이 참 급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일찍 가시는 분들은 
뭔지 모르게 급하게 서두르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2연은 두 분이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마시고 
오토바이에 맞선녀를 번쩍 안아서 태웠을까요. 

오토바이에 태웠으니 남정네의 등에 여자의 가슴이 스치면서 젊은 혈기에 확 불을 싸지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참기가 힘들었을까요. 그것도 바야흐로 봄날인데 말입니다.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후다닥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벌써 끝장이 났다니까”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남편)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첫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운명이 결정되고 마는 순간이 2연에서 펼쳐지는데 1연에서의 슬픔의 정조는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읽는 내내 웃음이 삐죽삐죽 새 나오게 만드는 서사시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마지막 3연은 더 절창입니다.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얼마나 빨리 끝났으면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었을까요? 그야말로 절묘한 묘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가 나옵니다. 

분명 슬픈 이야기인데 어쩜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단박에 바꿔칠 수 있는 걸까요? 거의 마술처럼 슬픔과 웃음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웃음 마술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워낙 첫 행사를 빨리 끝내신 양반이라서 바람 한 번 피울 여력이 없으셨겠지요. 그런데 가정용도 안 되었으니, 어떻게 상업용이 되었겠냐는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집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정말 날랜 양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빨리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힘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내공으로 가득찬 시인의 넉살 때문에 많이 웃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접한 최고의 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