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義理)를 지킨 남자 -
조선조 연산군 때 교리(정5품 문관) 이장곤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연산군이 잡아 죽이려 하자 함흥 땅으로 줄행랑을 쳤다.
어느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우물에서 물 긷는 처녀가 있었다. "내가 목이 몹시 마른 데 물 한 바가지 떠 줄 수 있겠느냐?" 나그네의 몰골을 살펴보던 처녀가 바가지로 물을 뜨더니 우물가에 흐드러진 버들잎을 훑어 물 위에 띄우고 건넸다.
교리 이장곤, 바가지에 뜬 버들잎을 후후 불어 마시고 갈증을 풀고 나니 그제야
제 정신이 돌아왔다.
이장곤은 바가지를 돌려주면서,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처녀에게 물었다.
"왜? 물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느냐?" "선비님이 급히 마시다가 체할 것 같아서 그랬사옵니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다, 참으로 영특한 처녀로구나.
치렁치렁 땋아 내린 긴 머리는 발밑에 닿을 듯하고, 얼굴은 달덩이, 미소 지을 때 옴폭 파인 보조개, 앵두 같은 입술,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입맛이 쩍쩍 당기는 처녀였다.
그러나 어쩌랴. 쫓기는 신세 이장곤은 더 이상 아름다운 시골 처녀의 환상에 젖어 있을 겨를이 없다.
당장 오늘밤 숙식부터가 문제 아닌가. 그래서 그는 이 동네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고 어느 허름한 집에 들게 되었다.
이 마을은 버들가지로 고리짝이나 바구니 등 가재도구를 만들어 먹고 사는 천민 계급 고리백정 마을이었다.
암튼, 이날 저녁상을 들고 들어 온 여인은 놀랍게도 낮에 봤던 그 처녀. 처녀는 밥상을 내려놓고 입술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되돌아 나갔다. 저녁상을 물린 후 그는 주인을 불러 수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자기는 한양 사는 이선달이고, 과거에 낙방하고 상심해서 무작정 유랑 길에 나섰다는 것 등등, 철저히 신분을 속였다.
그리고 주인에게 청을 넣었다. "여보게 자네 딸 날 주게"였다. 지금의 상식으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화법이지만 그 시대 상황에선 양반과 천민 간엔 당연한 말투였다. 천민으로 태어나 한스럽게 살아온 처지에 양반 사위를 본다는 것은 천지개벽을 할 노릇, 그야말로 신분 상승의 좋은 기회가 아닌가. "미천한 딸년이지만 그렇게 하시죠“ 이렇게 해서 교리 이장곤이 고리백정의 사위가 되었고 피신 길에 숨어 지낼 안가
(安家)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가 있는가?
먹고 자고 먹고 자고가 일과 였다. 처음엔 양반 사위님 보았다고 끔찍이도 위하든 장인도 놀고먹는 사위가 미워 말투도 차츰차츰 변했다.
"이 서방님 일어나셨습니까?"
"이 서방 일어나셨는가?"
"이 서방 일어났나?" "야, 이놈아 이 서방 아직도 자빠져 자냐?" "밥도 아깝다 그 자식 밥 주지 마라" 고리백정 장인 의 말투가 이처럼 갈수록 거칠어졌다. 그럴수록 누구 편도 들 수 없는 딸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낸지 몇 해 후, 어느날 게으름뱅이 사위가 느닷없이 장 구경을 다녀오더니 내일 관가에 보낼 고리짝은 자기가 받치고 오겠다고 자청했다. 장인은 생각했다. "관가에 고리짝 받치기가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데 제깐 놈이 감히 고리짝을 받치러 가겠다고? 오냐 못 받치고 오기만 해 봐라." 이튿날 교리 이장곤, 지게 위에 고리짝 한 짐 짊어 지고 관가를 찾아가 문을 지키 는 관졸들을 물리치고 큰 소리 로 외쳤다. "고리백정 사위 교리 이장곤이 버들고리 받치러 왔소" 관무를 보던 현령이 깜짝 놀랐다. "뭣이라고? 이장곤이라고?"
당시 조정은 중종반정 이후 임금이 이장곤을 백방으로 찾았다. 각 고을 수령 방백에게 이장곤을 찾아 보내라는 통문을 내렸으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현령이 벌떡 일어나 고리짝 짐을 지고 마당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사나이를 보았다. 비록 의복은 남루하지만, 번쩍이는 눈빛이 동문수학하고 함께 벼슬길에 올랐던 죽마고우, 이장곤. 바로 그 이장곤이 분명했다. 버선발로 뛰어 내려간 현령, "이 사람 장곤이 자네 이게 웬일인가? 자네 그동안 어디서 숨어 지냈나? 전하께서 자네를 백방으로 찾고 계신다네" "그동안의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쩔텐가? 이 고리짝 받아 줄란가 말란가?" "그야, 여부 있겠나“
두 벗은 대청마루에 올라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털어 놓았다. 저녁 늦게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온 사위를 본 장인, "고리짝은 받쳤느냐?" "받쳤네" 그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게으름뱅이 사위 놈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갑자기 마당은 왜 쓰느냐?" "손님이 온다네" "이놈이 미쳤나? 어제 고리짝 받치고 오더니 헛소리하네. 그래 누가 온다더냐?" "좀 있으면 알게 될 걸세" 잠시 후, 동구 밖이 시끌시끌했다. 시종배 거느리고 쌍 나발 불고, 이 고을 현령이 말타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길바닥에 엎드려 머리 조아리면서 현령이 어딜 가시나 지켜보고 의리(義理) 를 지킨 남자. 아니 이게 웬일? 게으름뱅이 이 서방 놈 처가로 들어가지 않는가? 느닷없이 찾아온 현령 행차에 장인도 장모도 이 서방 색시도 마당에 무릎 꿇고 엎드려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태연하게 웃고 있는 천덕꾸러기 이 서방이 현령을 맞이했다. "자네 왔는가. 어서 이리로 올라오게, 그리고 자네 형수한테 인사 올려야지, 여보 당신도 이리 올라와 인사 나눠 " 마당 위에 엎드려 있던 이장곤의 색시가 마루 위로 올라와 하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한 이 고을 현령과 형수씨. 제수씨, 허물없는 농담을 하면서 인사가 오갔다. 그리고 장인 장모도 불러올렸다. 주변에 모여서 이 희한한 광경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들의 웃음소리는 산 넘어 물 건너 멀리 더 멀리 메아리쳐 흩어졌다. 그후 교리 이장곤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실세 박원종의 천거로 복직되어 승승장구, 병조판서까지 지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실화(實話)다.
어떤가? 의리의리(義理)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배웠다.
첫째가
여인의 지혜였다. 체할까 봐 물에 버들잎을 띄워 준 것은, 그야말로 참으로 지혜롭다. 비록 백정의 딸이었지만
그 어떤 여인보다 지혜롭다. 성경 잠언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지혜로운 여인은 집을 세우는데 반면, 미련한 여인은 그 집을 자기 손으로 허무다"라고.
둘째는
이장곤의 그 의리(義理)다. 백정이 무언가? 천민이다. 사회적으로 짐승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던 백정이었다. 그런 백정의 딸을 정경부인 삼은 의리의 사나이 이장곤, 그야말로 "사람이 하늘이다" 를 실천한 인물이 아닌가? 얼마나 의리의리한 사람인가?
의리를 지키는 乙巳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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