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25 회
(그렇다 취옹정에 가서 그 늙은이를 상대로 술이나 듬뿍 마실까 그 늙은이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기 위해 술을 마시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열 번씩이나 낙방했다는 그는 분명 <인생의 낙오자>였다.
나 역시 온갖 희망을 잃어버린 <인생의 낙오자>가 아닌가. 두 낙오자가 서로 어울려 술이라도 마시면 그런대로 숨통이 트이게 될지도 모른다.)
김병연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슬며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어머니 말씀대로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마시고 오겠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잘 생각했다. 술로써 온갖 시름을 깨끗이 풀어 버리고 오너라.」
그러나 아내는 그래도 불안스러운지,
「어느 주막으로 가시는지 술집 이름이나 알려 주고 가세요.」
김병연은 대답을 안 하고 망건(網巾) 바람으로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따라 일어서며 말한다.
「아무리 술집에 가기로 점잖지 못하게 망건 바람으로 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갓이나 쓰고 가거라.」
김병연은 대번에 도리질을 하였다.
「죄인은 죄인답게 행세해야지, 양반도 아닌 놈이 무슨 염치로 어엿하게 갓을 쓰고 다닙니까. 저는 이제부터는 갓을 쓰지 못할 죄인입니다.」
사실 김병연은 <역적의 손자>임을 알고 난 이제 와서는, 양반연 하고 갓을 쓰고 다닐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이씨 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외관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으니, 죽을 생각만은 행여 하지 말아라!」
오랫동안 방안에 누워만 있다가 달포 만에 밖에 나온 김병연에게, 산속의 저녁 공기가 시원스럽기 그지 없었다.
<취옹정>의 부부
달포 전에 백일장을 보려고 읍내로 갈 때에는 신록(新綠)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에 계절이 바뀌어 이제는 녹음이 우거진 것이, 마치 머나먼 딴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산골짜기에는 황혼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먼 숲속에서는 접동새가 울고 있었다.
(대자연(大自然)은 이렇게도 질서 정연하게 전이(轉移)되어 가고 있구나. 게다가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만은 남 모르는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김병연은 그렇게 생각하자 또다시 좌절감이 복받쳐 오르며, 새삼스러이 술 생각이 간절하였다. 술을 마구 퍼마시고 세상만사를 깨끗이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산길을 20 리쯤 휑하니 달려 내려오니, 전에 가끔 들렀던 주막이 있었다.
그러나 돈만 알고 인정머리가 없는 그 집에 들르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취옹정>의 늙은이 같은 낙오자를 상대로, 가슴 속에 뭉쳐 돌아가는 울화를 마음껏 토로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에라, 읍내까지가 좀 멀기는 하지만 이왕이면 취옹정으로 가보자.)
보통 때 같으면 주인 늙은이보다도 젊은 주모가 그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슴속에 울화가 끓어 오르는 이날 밤에는 오직 늙은이만이 만나 보고 싶었다.
인생의 갖은 풍파를 다 겪었다는 그 늙은이라야만 자신의 고민을 알아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달이 밝아 산길을 걷기가 오히려 즐거웠다. 산속에서는 승냥이가 우는 소리도 들려 오고, 여우 소리도 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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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26 회
그러나 조금도 무섭지는 않았다. 산속의 맹수들은 이쪽에서 건드리지만 않으면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0리의 길을 쉬지 않고 걸어서 읍내가 눈 아래 굽어보이는 마지막 고개 위에 다다랐을 때에는, 밤은 어느새 먼동이 훤히 터 오고 있었다.
고개를 넘다가 무심코 바라보니, 길가의 커다란 넙적바위 위에 맨상투 바람의 늙은이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있는 품이 마치 <산중의 신선> 파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도 명상에 잠긴 채 움직이지 않는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 노인은 취옹정의 주인 늙은이가 아닌가.
「아니, 이 새벽에 선생이 이 산중에 웬일이십니까.」
너무도 뜻밖의 일이기에 김병연은 노인의 손을 덥석 움켜잡으며 다급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취옹 노인은 김병연의 얼굴을 잠시 멀거니 바라보다가,
「귀공은 누구시더라.」
하고 반문한다. 취중에 만났을 뿐이니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김병연은 취옹 노인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약간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취중에 만났을 뿐이므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 같아 얼른 자기 소개를 이렇게 하였다.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읍니만, 달포 전에 읍내에서 백일장이 있었던 날, 저는 취옹정에서 선생과 함께 술을 마신 사람입니다.」
취옹 노인은 그제서야 생각이 나는 듯 김병연의 손을 덥석 움켜 잡으며,
「아, 이제야 알겠네. 그렇다면 자네가 바로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를 한 김병연 공이 아닌가.」
하고 마치 죽었던 사람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이 반가와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김병연이 놀랄 판이었다.
「아니, 제가 장원 급제한 것을 선생께서 어떻게 아셨읍니까.」
「아따, 이 사람아! 내 비록 늙었기로, 글줄이나 한다는 놈이 백일장에 무관심할 수가 있는가.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한 자네 시(詩)는 나도 읽어 보았네. 자네는 놀랄 만큼 재기(才氣)가 환발(渙發) 하데 그려. 그러나 시로서는 명시일지 몰라도, 내용은 별로 찬성할 바가 못 되던걸.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신새벽에 자네가 도대체 이 산중에 웬일인가. 외관도 갖추지 않고 봉두난발(蓬頭亂髮) 로 말이야.」
김병연은 시의 내용이 신통치 못하다는 말에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러기에 취옹 노인의 견해를 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거론한 장소가 못 되기에 얼른 화제를 둘렸다.
「저도 저지만, 신새벽에 선생은 이 산중에 웬일이십니까.」
「나 말인가. 나는 진종일 술을 마시다가 초저녁에 한잠 자고 나면 영 잠이 와야지. 그래서 새벽마다 이 산 위에 올라오는 버릇이 있다네.」
「건강을 위해 새벽 산책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에끼 이사람! 다 죽게 된 나이에 건강이 무슨 건강인가」
「그러시다면 무엇 때문에?」
「자네는 글을 잘하니까 풍류도 잘 알고 있을 게 아닌가. 옛글에 〈만뢰적료중, 홀문일조농성 하면, 편환기허다유취(萬藾寂寥中 忽聞一鳥弄聲,便喚起許多幽趣〉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방이 고요할 때에 산에 올라와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무한한 아취(雅趣)가 절로 느끼진다는 말이지. 나는 새벽마다 그런 아취를 유일한 낙으로 삼아 오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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