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27 회
단순한 주광(酒狂)으로만 알고 있었던 취옹 노인에게 그와같이 고답적인 풍류가 있음을 알고, 김병연은 머리가 절로 수그러질 지경이었다.
「선생이 그런 아취를 가지고 계실 줄은 미처 몰랐읍니다. 그렇다면 선생은 도인(道人)이 아니십니까?」
「에끼 이사람! 진짜 도인이 들으면 앙천 대소(仰天大笑)를 하겠........ 그건 그렇고, 도대체 자네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취옹 노인은 김병연의 행세를 아래위로 눈여겨 보며 다시 한번 캐어 묻는다.
김병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실상인즉 마음에 괴로운 일이 생겨서 술을 마시려고 취옹정 을 찾아오던 길이었읍니다.」
「아 그래? ...... 취옹정에 오던 길이라면 마침 잘 만났네. 나하고 같이 내려가서 괴로움을 잊어버리는 데는 뭐니뭐니 해도 술 이 제일이거든.」
취옹 노인은 앞장서서 산을 내려오며,
「마음에 괴로운 일이 생겼다니, 그게 무슨 일인가?」
하고 묻는다.
「내용이 좀 복잡합니다.」
「내용이 복잡한 일이라?」
취옹 노인은 굳이 캐어 물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앞장서서 묵묵히 산을 걸어 내려오며,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인생의 화복(禍福)은 오직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 심지상무풍도()心地上無風濤)면 수재개청산녹수(隨在皆靑山綠樹)라는 옛글이 있으렷다.
마음에 물결만 없으면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이 푸른 그 수목이 아름답게만 보인다는 말이지. 그러나 마음을 고요하게 가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어야 말이지.
취옹 노인은 순전히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김병연은 뒤따라오며 그런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이 자꾸만 초라하기 짝없는 존재처럼 여겨 졌다.
취옹 노인은 가파른 산길을 거침없이 걸어 내려오며 또다시 독백을 계속한다.
「영화(榮華)와 오욕(汚辱)에도 마음만 흔들리지 않으면, 뜰 앞의 꽃들이 자연스럽게 피고 자연스럽게 지는 모양을 한가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으렸다. 옛날 사람들은 그런 심경을 <달인(達人)의 심경)이라고 일러 왔었지.
취옹 노인은 누구더러 들으라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김병연은 그런 말을 들을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형편 없는 속물인 것 같은 느낌이 절실해 왔다.
자기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괴로워 하고 있지만, 취옹 노인에게 는 한낱 웃음거리로만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윽고 취옹정에 당도하자. 취옹 노인은 사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안마당으로 들어서며,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 오늘은 새벽부터 손님이 있어서 재수가 좋은걸.」
그리고 방문을 열어 보고 나서,
「이 집 주모가 어디를 갔는고. ......설마 쌀이 떨어져서 새벽부터 쌀 동냥을 갔을 것은 아니고...... 우리끼리 술만 마시면 그만이니까, 어서 들어와요.」
방안으로 따라 들어와 보니, 과연 주모는 보이지 않았다.
김병연은 주모가 어디를 갔을까 싶어, 약간 궁금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취옹 노인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 아니하고, 부엌으로 나가더니 술상을 손수 차려 가지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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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28 회
「자, 자네가 술을 마시러 왔다니, 우리 한잔씩 나누세.」
김병연은 술상을 대하고 앉자, 마음 속에 고통이 새삼스러이 복받쳐 올랐다.
그리하여 취옹 노인이 따라 주는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술잔을 다시 내밀어 보이며 말한다.
「미안하지만 한잔만 더 따라 주십시오.」
취옹 노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이 사람아! 아침부터 무슨 술을 폭음(暴飮)을 하려고 드는가.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술이란 조금씩 마셔야만 맛>이라고 하셨다네.」
「공자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거나, 한잔 더 따라 주십시오.」
취옹 노인은 마지못해 술을 따라 주면서 묻는다.
「술이라는 것을 누가 만들어 냈는지, 자네 알고 있는가.」
「저는 그런 것은 모릅니다. 술이란 마시기만 하면 그만이지,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에 씁니까.」
「무슨 소리!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상식으로라도 알아 둬야 하는 법이네. 술은 지금부터 5천 년 전인 우(禹)임금 시대에 <의적(儀狄)>이라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네.」
「선생도 한잔 드십시오. ......술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사람이 의적이었다구요?」
취옹 노인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그렇지! 술은 의적이라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야. 그런데 우왕(禹王)은 술을 처음으로 마셔 보고 나서, 도연(陶然)히 취해 오는 기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지, 그는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유명한 훈계(訓戒)를 내린 말씀이 있었네.」
「어떤 훈계를 남겼다는 말씀입니까.」
「우왕은 후세 사람들더러 술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후세에 가면 술로 인해 나라를 망치는 자가 반드시 있으리라(後世必有以酒亡國者)〉는 말씀을 남기셨네.
그런데 자네는 아침부터 경음(鯨飮)을 하려고 드니, 자네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게 아니라, 자네 자신을 망치려고 하는 게 아닌가.」
김병연은 술을 달라고 손을 또다시 내밀어 보이며,
「취옹 선생! 그 점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망할 대로 망해 버린 놈이니까, 더 이상 망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놈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술이나 마음껏 마시기로 하겠읍니다.」
취옹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김병연의 얼굴을 멀거나 건너 다보다가,
「여보게 김 공! 옛글에 〈청공낭월, 하천불가고상, 이비아독투야촉(晴空朗月, 何天不可翶翔, 而飛蛾獨投夜燭)〉이라는 말이 있네. 자네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알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
글 타령이 나오자, 김병연은 은근히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아니 선생은, 달라는 술은 안 주시고 나와 〈글내기〉를 해보자 는 말씀입니까?
취옹 노인은 글내기라는 말에 펄쩍 뛸 듯이 놀란다.
「에끼, 이사람! 글내기란 천만부당한 말일세. <술마시기 내기>라면 나도 자네와 겨뤄 볼 자신이 있네. 그러나 과거에 열 번 적이나 낙방한 높은 놈이, 백일장에 장원 급제한 자세와 글내기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야. 다만 나는 <청공낭월운운>이 라는 글을 자네도 읽어 본 일이 있는가 싶어서, 한번 물어 보았을뿐일세」
취옹 노인이 겸허한 태도로 나오는 바람에, 김병연은 불현듯 겸연쩍은 느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조금 전에 선생께서 말씀하신 글은 《채근담(菜根譚)》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이 아닙니까.」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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