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61 회
김삿갓은 목이 컬컬하던 판인지라, 생각조차 못했던 향연에 참여하게 된 것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훈장은 자신의 신변 보장을 위함인지 당주인 풍헌 영감에게 연방 아첨을 떨고 있었다. 그러나 김삿갓에게는 그 꼬락서니가 매우 못마땅해 보였다.
이윽고 서당이 파하게 되자, 훈장은 김삿갓을 내버려둔 채 풍헌 영감을 다른 술집으로 모시고 나가 버린다.
김삿갓은 저녁밥을 한술 얻어먹고 나니 심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파적걸이 삼아, 초학 훈장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회시로 엮어 보았다.
산골 훈장이 위엄을 떨쳐 가며
낡은 관 높이 쓰고 가래침 뱉아 대네
고작 높은 제자가 《사략》 읽는 아이요
가깝다는 친구는 풍헌 영감이더라.
山村學長太多威 (산촌학장태다위)
高着塵冠鍤唾投 (고착진관삽타투)
大讀天皇高弟子 (대독천황고제자)
尊稱風憲好朋儔 (존칭풍헌호붕주)
모를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 핑계대고
주석에선 늙었노라 술잔을 먼저 받네
서당 밥 한 그릇에 생색내며 하는 말이
금년 과객 모두가 양주 사람이라네.
每逢兀字憑裵眼 (매봉올자빙사안)
輒到巡杯藉白鬚 (첩도순배적백발)
一飯黌堂生色語 (일반횡당생색어)
今年過客盡楊州 (금어과객진양주)
등잔 밑에 홀로 앉아 이상과 같은 붓장난을 즐기고 있는데, 문득 문밖에서 소년의 목소리로,
「과객 선생님, 주무시 옵니까?」
하고 조심스럽게 묻는 소리가 들려 오지 않는가.
(나를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누가 이 밤중에 ? ......)
김삿갓은 의아스럽게 여기며,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문밖에는 14, 5세 가량 되어 보이는 소년이 하나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 아이는 아까 서당에서 《사략》을 읽고 있던 아이가 아닌가.
「아니, 너는 아까 서당에서 《사략》을 읽고 있던 아이가 아니냐. 네가 웬일로 이 밤중에 왔느냐.」
찾아온 아이는 허리를 연방 굽실거리며,
「선생님을 잠깐 뵙고 싶어 찾아왔사옵니다.」
「너의 선생님은 조금 전에 풍헌 영감과 함께 술집에 가셨다. 지금은 계시지 않으니 어떡하지.」
그러자 찾아온 아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닙니다. 우리 선생님을 만나 뵈러 온 것이 아니옵고 과객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어 왔사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적이 놀랐다.
「나를 만나러 왔다구?...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지만, 나를 만나러 왔거든 이리 들어오너라.」
머리채를 기다랗게 땋아 내린 아이는 방안으로 들어와서 김삿갓 에게 넙죽하니 큰절을 하고 나서는 자기 소개를 이렇게 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 서당의 접장(서당의 우두머리 제자를 말함)이온데, 이름은 조득남(趙得男)이라고 하웁니다. 과객 선생님께서 아까 서당에서 만나뵈은 조 풍헌 영감님은 바로 저의 아버님 되시는 분이옵니다.」
「아, 그래?......네가 바로 아까 그 풍헌 영감님의 아드님이란 말이지?.....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소년은 그 말에는 대답을 아니하고,
「과객 선생께서는 《사서삼경》을 모두 읽으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옵니까.」
하고 엉뚱한 말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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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62 회
아까 훈장에게 한 말을 옆에서 엿들은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실소를 하였다.
「《사서삼경》을 다 읽었지. 그건 왜 묻느냐.」
소년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제가 어떤 사람한테 편지를 냈더니 답장을 보내왔사옵는데, 저로서는 편지의 사연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사옵니다. 그래서 과객 선생님에게 편지 풀이를 좀 해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리려고 찾아왔사옵니다.」
「그런 일이라면 너의 선생님한테 물어 보면 될 게 아니냐.」
「우리 선생님은 글이 짧으셔서 아무리 보아도 모르실 것 같아, 선생님을 찾아온 것이옵니다.」
「에끼 이녀석! 너의 선생님이 모르실 일이라면 난들 어떻게 알겠느냐. 아뭏든 편지를 이리 내놔 보아라.」
소년은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보인다.
김삿갓은 문제의 편지를 펼쳐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편지라는 것은 하얀 참지 한복판에 오직 <籍>이라는 글자 한 자만이 댕그라니 씌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편지를 펼쳐 보고 어이가 없었다. 한문은 워낙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한 장의 편지를 거두절미하고 두세 글자만으로도 쓸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오직 한 자만으로 되어 있는 편지를 대하기는 만고에 없던 일이 아닌가.
「가만있자. 이것은 <문서적(籍)> 자라는 글씨가 하나뿐이지, 이게 어디 편지냐. 혹시 네가 다른 종이를 편지로 잘못 알고 바꿔 가지고 온게 아니냐.」
그러자 조 소년은 펄쩍 뛰면서 머리를 힘차게 좌우로 흔든다.
「절대로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미쳤다고 편지와 다른 종이를 바꿔 가지고 왔겠읍니까.」
김삿갓은〈籍〉자를 다시 한번 꼼꼼히 쳐다보았다. 글자는 한 자뿐이지만 필적만은 보통 솜씨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籍>자는 <籍>자일 뿐이지 그 이상의 뜻은 알 길이 없었다.
김삿갓은 마침내 손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리 보아도 무슨 뜻인지 전연 모르겠는걸.」
그러자 소년은 크게 실망하는 빛을 보이며 탄식하듯 말한다.
「《사서삼경》까지 읽으셨다면서 이것을 못 알아보시겠다는 말씀 입니까.」
「《사서삼경》이 아니라 오서삼경(五書三經)까지 읽었어도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
「선생님이 모르신다면 큰일입니다.」
조 소년은 먼 하늘을 쳐다보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고 있다. 김삿갓은 어떡하든지 조 소년을 도와주고 싶었다.
「이 편지가 그렇게도 중대한 편지냐?」
「물론입니다. 저의 모든 운명이 이 편지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옵니다.」
「뭐? 네 운명이 이 편지에 걸려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우선 그 얘기부터 좀 들어 보자. 그 얘기를 들어 보노라면, 이 편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 소리에 조 소년은 다시금 얼굴에 생기가 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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