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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09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5. 9. 15:55

방랑시인 김삿갓 1-109 회

「一粒栗中藏世界」  (일립율중장세계) 

김삿갓은 주모가 읊는 시구를 들어 보고 크게 놀랐다. <一粒栗中藏世界>라는 시는 《오등회원(五燈會元)》이라는 불서 (佛書)에 나오는 시로서, 그것은 우주의 원리를 일곱 개의 글자로 집약하여 표현해 놓은 너무도 심오한 시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대답할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주모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모한테 누가 그처럼 심오한 시를 적어 주던가?」

주모는 내기에 승리할 자신이 있는지 의기양양한 태도로 대답을 재촉한다.

「내기 문제를 누가 가르쳐 주었든 간에, 대답을 못 하겠거든 빨리 손이나 드세요.」

그러나 김삿갓은 자신만만하게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좁쌀알 한 알 속에 온 세계가 숨어 있어
반 되들이 솥 속에서 하늘과 땅을 삶는다.

一粒粟中藏世界 (일립율중장세계)
半升鐺內煮乾坤 (반승당내자건곤)

주모는 문제가 적혀 있는 종이 두루마리를 들여다보다가, 김삿갓의 대답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크게 감탄한다.

「첫 문제는 용하게도 알아맞혔네요. 그러나 두번째는 안 될 거예요.」

주모는 두번째의 문제를,

「二月江南花滿枝.」 (이월강남화만기)

하고 말한다.

김삿갓은 이번에도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월이면 강남에서는 가지마다 꽃이 피니
타항에서 한식을 맞는 몸 고향 생각 간절쿠나.

二月江南花滿枝  (이월강남화만기)
他鄉寒食遠堪悲  (타향한식원감비)

김삿갓은 대답만으로는 부족한 듯 그 시에 대한 해설까지 덧붙인다.

「지금 그 시는 당나라 시인 맹운경 (孟雲卿)의 <한식일>이라는 시렷다.」

주모는 약이 오르는지, 이번에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세 번째의 문제를 읊는다.

「三五夜中新月色.」 (삼오야중신월색)

김삿갓은 또다시 짝을 맞춰 대답한다.

한가위 보름밤에 달이 솟아 아름다우니
이천 리 타향 사는 친구의 마음은 어떠할까.

三五夜中新月色  (삼오야중신월색)
二千里外故人心  (이천리외고인심)

그리고 김삿갓은 이번에도 해설을 붙인다.
「이번 시는 백낙천이 한가위 날 밤에 달을 바라보며 옛친구를 생각하고 읊은 시라네.」

세 문제를 거침없이 척척 받아넘기니, 주모는 적이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낙담은 하지 않았다.

네번째의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四十餘年睡夢中.」(사십여년수몽중)》

그러자 김삿갓은 이번에는 해설부터 하기 시작하였다.

「그 시는 명(明)나라의 왕수인(王守仁)이라는 사람의 <수기우성 (睡起偶成)>이라는 시라네. 내가 전문(全文)을 읊어 보일 테니 들어 보라구.」

그리고 김삿갓은 시 한 편을 다음과 같이 읊어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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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10 회

사십여 년을 꿈속에서 살아오다가 
이제야 깨어나니 눈앞이 텁텁하네 
해가 이미 한낮이 지난 줄도 모르고 
이제사 다락에 올라 새벽종을 치노나. 

四十餘年睡夢中 (사십여년수몽중)
而今醒眼始朦朧 (이금성안시몽롱) 
不知日已過停午 (부지일기과정오)
起向高樓撞曉鐘 (기향고루당효종)

실로 고금 시서(古今詩書)에 무불통달 (無不通達)한 김삿갓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당해 내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김삿갓이 네 문제를 모두 응구 첩대로 척척 받아넘기는 것을 보고, 주모는 놀라움을 지나 탄복을 마지않았다.

실상인즉, 주모는 한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손님의 돈을 공짜로 빼앗아 먹을 요량에서 어떤 한학자(漢學者)에게 내기 문제를 알려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 한 학자는一,二,三四, 五의 순서대로 숫자로 시작되는 다섯 구절의 시와 그에 대한 대구(對句)를 적어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한시 짝맞추기 내기를 걸어 보아요. 그러면 대개는 첫 문제나 둘째 문제에서 손을 들게 될 거야. 만약 세 문제나 네 문제까지 알아맞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나라의 이태백일 것이오.」

하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삿갓은 이쪽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 문제를 척척 받아넘겨 버리니, 주모는 놀라움을 지나 탄복을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태가 그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내기에 지고 이기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김삿갓에 대해 인간적으로 존경심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주모는 감격 어린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보며 말한다.

「손님이 한시에 대해 그렇게까지 훌륭하신 분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김삿갓은 시큰둥한 어조로 마지막 문제를 재촉한다.

「내기를 하다 말고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다섯 문제 중에서 五자로 시작되는 문제 하나가 아직도 남아 있지 않는가. 그 문제를 빨리 말해 보아요. 그 문제까지 이겨 내야만 내가 술을 공짜로 먹게 되는 게 아닌가.」
「손님은 한시에 대해 그렇게도 자신이 있으세요?」
「자신이 있든 없든 간에, 일단 시작한 내기니까 끝을 해야 할게 아닌가?」
「그럼 좋아요. 남아 있는 마지막 문제를 못 맞혀도 술값은 석 잔 값을 꼭 내놓으셔야 하는데, 그래도 좋아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은근히 마음이 켕겼다. 그러나 일단 시작한 내기니 질 때에는 지더라도 끝까지 큰소리를 칠밖에 없었다. 

「그것은 처음부터의 조건인데, 무엇 때문에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김삿갓은 빨리 결판을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모는 좀처럼 내기를 속개하려고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한다.

「지금까지 네 문제를 너무도 기막히게 잘 맞혀 주어서, 마지막 문제를 말하기는 어쩐지 두려운 생각이 들어요.」
「두렵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마지막 문제까지 맞혀 버리면 술값을 못 받게 되어 겁이 난다는 말인가.」

그러자 주모는 얼굴에 노기를 띠며 이렇게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건 아니에요. 손님이 생각하듯 나는 돈만 알고,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는 아니에요.」

김삿갓은 주모의 엉뚱한 분노에 어리둥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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