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117 회
저녁 연기 한줄기 들에 떠오르고
달은 저물어 지평선에 지노나
남으로 오는 기럭아 말 물어 보자
우리 집에서 무슨 기별이 없더냐.
孤烟生曠野 (고연생광야)
殘月下平蕪 (잔월하평무)
為問南來雁 (위문남래안)
家書寄我無 (가서기아무)
산속에도 가을이 깊어 바람이 차갑다. 낙엽은 바람에 휘날리는데 무심한 새들은 영절하게 울고 있어서, 산길을 외로이 걸어가는 김삿갓은 오늘따라 고향 생각이 유난히 간절하였다.
김삿갓은 산길을 홀로 걸어가며 고향 그리운 감정을 스스로 꾸짖어 본다.
(이 못난 놈아! 집을 떠날 때에는 죽어도 집 생각은 아니하겠노라고 철석같이 맹세했던 네가 아니었더냐. 그러한 네가 이제 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무슨 못난 짓이냐).
고향 생각이 갑작스럽게 간절해 오는 것은, 어쩌면 가을이라는 계절의 탓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반드시 계절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계절의 탓이라기보다도 몸에 돈이 한푼도 없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였다.
돈이 없어도 먹고 자는 일만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먹고 자는 일은 서당이나 절간을 찾아가면 이럭저럭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술만은 마실 수가 없다. 남의 집 대문을 두드려서 밥은 얻어먹을 수 있어도, 술만은 빌어 마실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 집 생각이 간절해 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던 것이다.
술을 못 마신 지도 이러구려 4, 5일.
이날도 산속을 혼자 걸어가고 있노라니까, 4, 5명의 늙은이들이 정자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냥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화주를 마셔가며 시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술을 보자, 염치 불구하고 그들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비윗살 좋게 이렇게 말했다.
「지나가던 길손이올시다. 목이 컬컬해 그러니, 미안하지만 술 한잔만 선사하십시오.」
저희끼리 즐겁게 떠들어대고 있던 늙은이들은 불의의 침입자를 보자, 입을 다물고 일제히 김삿갓을 쏘아본다. 모두가 하나 같이 불쾌감이 넘쳐 있는 시선들이었다.
그중의 한 늙은이가 아니꼬운 어조로 김삿갓을 나무란다.
「우리들은 지금 흥에 겨워 시를 짓고 있는 중이오. 당신이 누구길래 남의 모임에 뛰어들어 파흥 (破興)을 하오.」
그러나 그 정도의 비난에 겁을 내어 자리에서 일어설 김삿갓은 아니었다.
김삿갓은 익살스러운 웃음을 웃어 보이며 능글맞게 이렇게 말한다.
「어르신네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시를 지으신다니 참으로 좋은 모임이시옵니다. 소생도 한몫 끼어들어 한수 읊을 용의가 있사오니, 우선 술이나 한잔 주시옵소서.」.
늙은이들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김삿갓의 행색을 새삼스러이 살펴본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두루마기에는 땟국이 꾀죄죄 흐르는 꼴이 어디로 보아도 시를 지을 만한 위인은 못 되어 보였다.
한 늙은이가 정색을 하고 나 앉으며 김삿갓에게 따지듯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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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18 회
「아니, 당신 같은 사람이 제법 시를 짓겠다는 말인가.」.
김삿갓은 늙은이들을 익살스러운 눈으로 둘러보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시에 능하지는 못하오나, 시를 다소 배우기는 배웠읍니다. 따라서 여러 어르신네들께서 시를 꼭 지어 보라고 하신다면, 저도 화답 정도는 하겠읍니다. 그러나 저는 술을 마셔야만 시상이 떠오르는 고약한 버릇이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시를 짓게 하시려거든 술을 몇 잔만 미리 마시게 해주시옵소서.」
김삿갓은 술을 빨리 마시고 싶은 생각에서, 그런 엉터리 수작을 부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늙은이들은 그 말을 듣고 나자, 저희들끼리 마주 보며 수군거 린다.
「오늘은 아주 괴짜 불청객이 뛰어들었군 그래.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시를 짓지 못한다면 이태백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태백은 무슨 놈의 이태백이야. 술이 마시고 싶으니까 엉터리 수작을 부리는 것이지.」
「누가 아니래. 아무러나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까, 시를 얼마나 잘 짓는지 시험삼아 술을 몇 잔 주어 보세그려.」
「좋은 생각이야. 이태백의 시를 들어 보려면 술부터 대접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하하.」
늙은이들은 김삿갓을 경멸하는 말을 저희끼리 씨부려 대더니 저마다 술잔을 내밀어 주며 말한다.
「내 술 한잔 받으소.」
「내 술도 한잔 받고 나서 좋은 시를 한수 들려주소.」
「나도 부탁이네. 내 술도 한잔 받으소.」
늙은이들은 김삿갓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앞을 다투어 가며 술을 따라 준다.
김삿갓은 사양하지 않고 주는 대로 넓죽넓죽 받아 마셨다.
오래간만에 마셔 보는 술인지라 대여섯 잔을 연거푸 마시고 나니, 기분이 그렇게도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꺼르륵 하고 술트림을 기다랗게 내뿜어 보이며,
「여러 어르신네들 덕택에 제가 오늘은 아주 주태백이 되어 버렸읍니다.」
하고 큰소리를 쳐보였다.
거만하기 짝 없는 시골 늙은이들을 간접적으로 조롱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늙은이들은 이태백으로 자처하는 김삿갓의 태도가 볼수록 비위에 거슬리는지, 한 늙은이가 말한다.
「술을 그만큼 얻어 자셨으면, 이제는 시를 한수 읊어야 할 게 아닌가」
김삿갓은 즉석에서 대답한다.
「좋습니다. 노인장께서 한 수 먼저 읊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화답을 하겠읍니다.」
「그러면 내가 <鳥><雲><群>자를 운자로 써서 한수 읊을 테니 자신이 있거든 화답을 해보소.」
그리고 늙은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종이에 써갈기는 것이 아닌가.
돌 위에 풀이 나기 어렵고
방안에서는 구름이 일어날 수 없거늘
산에 사는 무슨 놈의 잡새가
봉황의 무리 속에 날아들었는고.
石上難生草 (석상난생초)
房中不起雲 (방중불기운)
山間是何鳥 (산간시하조)
飛入鳳凰群 (비입봉황군)
김삿갓은 문제의 시를 읽어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김삿갓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시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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