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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23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5. 16. 15:35

방랑시인 김삿갓 1-123 회

그러나 정작 그 말을 해놓고 보니, 깊은 산골에 단 두 내외만 이 살다가 남편이 죽었는데, 친척이나 이웃집에 그 사실을 알려 즉 사람은 미망인 이외에 또 누가 있을 것인가.

여인은 그러한 사실을 즉시 깨달았는지, 젖먹이를 부랴부랴 뒤집어 업더니, 아들아이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가며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알려야 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지금 곧 다녀올 테니, 미안하지만 손님은 시체를 좀 지키고 있어 주세요.」

김삿갓은 눈앞이 아찔해 왔다.

「여보시오. 시체를 내게 맡기고 가버리면 어떡하오.」

김삿갓은 황급히 밖으로 쫓아 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여인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어두운 산골짜기를 휑하니 달려 내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한숨을 쉬며 방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텅 비어 있는 방안에 시체를 놓고 혼자 앉아 있자니 등골이 절로 오싹거린다. 

설마 죽은 사람이 무슨 일이야 있으라마는 등잔 불이 바람에 너훌너홀 춤을 추기만 해도 유령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공포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시체를 바라보며 소리 내어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사람아! 생전에 만나 본 일조차 없는 자네의 시체를 내가 왜 혼자서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 방사가 뭐길래, 재미를 적당히 볼 노릇이지 그까짓 걸 죽기내리로 하다가 이 모양 이꼴이 되었단 말인가?」

김삿갓은 시체를 지키느라고 기나긴 가을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 저녁을 굶은 채 밤을 새고 나니, 배가 고파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주인 여자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므로, 아침 밥을 손수 지어먹으려고 이 구석 저 구석을 뒤져 보니, 쌀은 없어도 감자가 다섯 섬 이나 있다. 

감자만이 아니라 콩이니 팥이니 하는 잡곡들을 꽤 많이 저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두 내외가 제법 재미나게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김삿갓은 손수 감자를 삶아 먹으며 시신을 향하여 이렇게 나무라 주었다.

「이 사람아! 이처럼 재미나게 살다 죽어 버렸으니, 마누라는 어린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자네야말로 인정머리없는 사내놈일세.」

김삿갓은 그렇게 말하다가 불현듯 집에 있는 마누라 생각에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남편의 죽음을 알리려고 한밤중에 집을 나갔던 초상 과부는 조반 때가 훨씬 지나서야 시형님 내외분과 4, 5명의 이웃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형님 되는 사람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죽은 아우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더니,

「못난 자식! 한창 살 나이에 죽기는 왜 죽어!」

하고 말하며 손등으로 눈물을 몇 방울 씻어 낼 뿐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오는 순박한 그들에게는, 죽음이라는 인생 최대의 비극도 한낱 자연 현상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확인하고 나자, 곧 장사 치를 준비를 서두른다.
그러나 초상 과부는 아직도 남편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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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24 회

어젯밤에 죽었으니까 오늘만은 집에 그냥 두고 싶어요. 장사는 내일 치르게 해주세요.」

그러나 장사를 치르려 온 사람들은 고기를 좌우로 기울인다.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그까짓 썩어 가는 시체를 집에 묵혀 두어 무엇하오.」
「그래도 하룻밤만 집에 더 두고 싶어요.」
「살아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도 시체는 빨리 묻어 버리는 것이 상책일 것이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아이들을 생각해서도 그렇게까지 섭섭하게 보내 버릴 수는 없어요.」

초상 과부가 끝끝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장사는 삼일장으로 치르기로 하였다. 뭐니뭐니해도 진심으로 애통해 하는 사람은 마누라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날 행상을 치르는데, 상여도 변변치 않았거니와 상례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까 모든 절차를 김삿갓이 주관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구(靈柩)를 방에서 들어 내려고 하자, 과부댁은 관을 부둥켜 잡고 통곡을 하다가, 문득 김삿갓을 돌아다보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호소한다.

「여보세요, 과객 어른! 손님에게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어요.」 

김삿갓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였다.

「부탁이라뇨? 무슨 부탁인지 말씀해 보시죠.」

그러자 초상 과부는 눈물을 닦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우리 집 애기 아버지가 마지막 가는 길이므로, 이대로 보내기는 너무도 섭섭해 못 견디겠어요. 남들처럼 장사를 호화롭게 지내 주자는 뜻은 아니지만, 만장(輓章)만은 한틀 꼭 있었으면 싶어요. 어려운 부탁이지만 손님께서 만장 한틀만 써주세요.」 

김삿갓은 여인의 심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마지막 보내는 길에, 무슨 축원문이라도 한마디 들려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알겠소이다. 만사(絶詞)를 써달라는 말인가보군요.」
「네, 그래요. 꼭 하나 써주세요. 꼭 부탁이에요.」
「만사는 비단이나 무명 같은 천에 써야 하는데, 댁에 만사를 쓸만한 천이 있을까요? 천이 없으면 흰 종이를 기다랗게 이어서 쓸 수도 있기는 하지만................」
「아니에요. 종이에 쓰지 말고 천에 써주세요. 만장을 쓸만한 천이 집에 있어요.」

여인은 장롱문을 열고 백목 한필을 김삿갓에게 꺼내 주면서, 

「만사를 여기다 써주세요.」

그리고 또다시 흐느껴 울며 이런 넋두리를 하는 것이었다. 

「두루마기를 그렇게도 입고 싶어하기에, 이번 명절에는 두루마기를 지어 주려고 무명까지 한필 구해 놓았는데, 두루마기 감을 만장으로 쓰게 되었으니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오. 아이고 아이고.........」

김삿갓은 초상 과부의 넋두리를 듣고 있자니, 자기 자신도 가슴이 메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아뭏든, 두루마기를 지으려던 무명을 만장감으로 내놓았으니, 만사를 아니 쓸 수는 없게 되었다.

(만사를 뭐라고 써야 할 것인가?)

김삿갓은 배낭 속에서 벼루를 꺼내어 먹을 갈며, 무슨 말을 쓸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저 하늘가의 흰구름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라가다.

乘彼白雲 (승피백운)
羽化登仙 (우화등선)

라는 문구가 대뜸 머리에 떠오른다.

만장에는 그런 말을 흔히들 써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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