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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31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6. 12. 15:43

방랑시인 김삿갓 2-31 회

海月亭에서의 회포

김삿갓이 무봉의 꾐수에 걸려들어 훈장 노릇을 하게 된 지도 이러구러 4,5개월. 세상에 훈장처럼 고리타분하고도 허무맹랑한 직업이 다시는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코흘리개들을 상대로 <하늘 천, 땅 지〉가 아니면 <맹자왈(孟子曰), 공자왈(孔子曰)〉만 외고 있어야 하니, 세상에 그처럼 따분한 직업이 어디 있겠느냐 말이다.

그나마 머리가 총명하여 쉽게 깨우쳐 주는 아이가 더러 있으면 그런대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아이들은 모두가 까마귀 알을 먹었는지 열이 하나같이 아둔하기 이를데 없어서 <天, 地, 玄, 黄>네 글자를 열흘이 넘도록 가르쳐 주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데는 똥이 탈 노릇이었다.

김삿갓은 <훈장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생기게 된 연유를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인간세의 모든 욕망을 털어 버리고, 한평생을 한운 야학(閑雲野鶴)처럼 한가롭게만 살아가려던 내가, 어쩌다가 이처럼 비참한 몰골이 되어 버렸을까.)

솔직이 말하면, 김삿갓은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충동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받았다. 그러면서도 도망을 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질질 끌려 오고 있는 원인은, 자기가 떠나 가면 20여 명 아이들의 장래가 너무도 불쌍해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어린것들의 장래를 위해 참을 수 있는 데까지는 참고 견디면서, 적당한 후임자를 조속히 물색해 보기로 하자.)

김삿갓은 후임자를 구해 달라고 무봉에게 몇 차례 부탁을 해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무봉은 그때마다 코방귀를 뀌며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후임자가 무슨 필요요. 삿갓 선생은 아무 소리 말고 한평생을 나와 함께 우리 마을에서 살아가기로 해야 하오.」

김삿갓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불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훈장의 고리타분한 신세를 다음과 같은 詩로 읊어 본 적도 있었다.

세상에 훈장을 누가 좋다고 했던가 
연기도 없는 불길이 절로 타오르네 
하늘 천 땅 지 외는 새 청춘이 가고 
부요 시요 하다 보니 머리가 세네.

世上誰云訓長好 (세상수운훈장호)
無烟心火自然生 (무연심화자연생)
曰天曰地靑春去 (왈천왈지청춘거)
云賦云詩白髮成 (운부운시백발성)

정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렵고 
자리만 잠시 떠도 비난받기 일쑤다 
천금같이 귀한 자식 훈장에게 맡겨 놓고
잘못하면 매질하라 진정으로 부탁하네. 

雖誠難聞稱道語 (수성난문칭도어)
暫離易得是非聲 (잠난역득시비성)
掌中寶玉千金子 (장중보옥천금자)
請囑達刑是真情 (청촉달형시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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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32 회


훈장 생활 몇 달 동안에 몸소 겪은 심정을 시로써 토로해 버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훈장 생활을 하루속히 청산해 버려야 하겠다는 생각만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김삿갓은 따분한 감정을 떨쳐 버리기 위해 틈만 있으면 뒷산으로 달려 올라가기가 일쑤였다. 때로는 아이들끼리 글을 읽도록 내버려둔 채, 자기는 산에 올라가 영시(詠詩)와 농화(弄花)로 하루 해를 보낼 때도 없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학부형들 간에는 비난의 소리가 없지 않았으나, 김삿갓은 그와 같은 시비는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마을의 진산인 석가산 중턱에는 해월정(海月亭)이라는 고색이 창연한 정자가 하나 있다. 김삿갓은 깊은 산속에 그와 같은 정자가 있는 것을 얼마 전에야 처음으로 알아내었다.

해월정에서는 동해 바다가 아득히 바라보인다. 특히 수평선 저 쪽에서 보름달이 떠오를 때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해월정이라는 이름은 거기서 생겨난 이름인성 싶었다.

해월정에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다. 해월정은 이조 때보다도 고려 때에 더 유명했던지, 지금도 정자 안에는 고려 때의 명사들의 현판시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그 중에는 고려조의 고관이었던 정구(鄭矩)가 해월정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읊은 다음과 같은 시도 있었다.

푸른 물결 갈매기에 해당화질 거니니
얼굴에 스치는 꽃바람이 추운 줄 모르겠네. 

蒼波白鳥海棠路 (창파백조해당로)
吹面不寒花信風 (취면불한화신풍)

그리고 또, 고려 때의 시인이었던 강회백 (姜淮伯)도 해월정에 노닌 일이 있었는지 그는 해월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바다의 달은 빈 누각에 떠오르고
산위의 구름은 정자 난간을 지나가네.

海月生虛閣 (해월생허각)
山雲渡曲欄 (산운도곡난)

모두가 실감 나는 시들이었다.
고려 때의 고관이었던 고조기 (高兆基)도 해월정에 대해 이렇게 읊어 놓았다.

새는 서리 찬 새벽 숲속에 지저귀고
바람은 나그네의 선잠을 깨운다
처마끝에는 반쪽 달이 걸려 있어
못다 이룬 꿈이 하늘가에서 끊기네.

鳥語霜林曉 (조어상림효)
風驚客楊眠 (풍경객탑면)
簷殘牛規月 (첨잔반규월)
夢斷一涯天 (몽단일애천)

김삿갓은 시간만 있으면 해월정에 올라와 고인들의 시를 감상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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