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45 회
주막 <然然>
얼마를 가다 보니, 커다란 소나무 그늘에 농사꾼인 듯싶은 장정 하나가 네 활기를 쫙 펴고 태평세월로 누워 있었다. 지게와 낫이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나무를 하러 가다가 낮잠을 자려는 모양이었다.
김삿갓이 가까이 가니 벌떡 일어나 앉는다. 두 눈이 왕방울처럼 부리부리하고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호락호락한 위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양반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기에, 김병연은 옆으로 다가 가서,
「날이 몹시 덥군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시는 길인가요.」
하고 말을 걸었다.
농사꾼은 옆자리를 비켜 주며,
「여기 좀 쉬어 가시오... 방립을 쓴 것을 보니, 상제님인가 보죠.」
하고 말한다.
김병연이 쓰고 있는 삿갓을 방립 (方笠)으로 잘못 알고 물어보는 말이었다.
김병연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상제가 쓰고 다니는 방립이 아니고 단순한 삿갓이라오.」
「상제도 아닌 사람이 볼품 사납게 삿갓은 왜 쓰고 다니시오.」
「그럴 사정이 있어서 쓰고 다니지요.」
김병연은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술집을 알아보려고 그 사람에게 초면 인사를 청했다.
「참, 오다가다 만난 것도 전생부터의 인연이라고 했으니 우리 인사나 나누고 지냅시다. 나는 김삿갓이라는 사람이외다.」
(이때에 김병연은 자기 이름을 <김삿갓>이라고 처음으로 소개하였고, 그 이후로는 누구한테나 시종 일관 김삿갓으로 통해 왔 다.)
촌사람은 김삿갓이라는 말을 듣고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라 묻는다.
「노형은 지금 이름을 뭐라고 하셨소?」
「성은 김가요, 이름은 삿갓이라오」
「삿갓? ........에이 여보시오. 세상에 무슨 그런 망측스러운 이름이 있단 말이오?」
촌사람은 자기를 놀리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물론 촌사람을 희롱하기 위해 자기 이름을 <삿갓>이 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 앞으로는 김병연이라는 본명을 일체 쓰지 않을 결심에서 자기 소개를 김삿갓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턱 없는 촌사람은, 자기를 농락하는 줄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변명할밖에 없었다.
「허허허, 삿갓이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망측스럽게 들리시오? 우리 시골에는 개똥이니 소똥이니 하는 이름도 얼마든지 많은걸요 그에 비기면 삿갓이라는 이름은 제법 점잖은 편이 아니오?」
촌사람은 암만해도 미심쩍은지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노형 입으로 말한 이름이니 틀림은 없겠지요. 나도 내 이름을 소개하겠소 나는. 성은 백가(白哥)이고, 이름은 건달(建達)이라 하고. 이름이 워낙 괴상하기 때문에 남들은 나를 흔히 < 백수건달(白手乾達)>이라고 부른다오.」
하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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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46 회
촌사람의 이름이 정말로 <건달>인지 어쩐지, 사실 여부를 김삿갓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놀림을 당하는 줄 알고, 반발심에서 일부러 그런 이름을 주워 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삿갓은 구태여 그런 것까지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도 더 급한 것은 술 생각이기에,
「이름 타령은 이제 그만합시다. 나는 아까부터 목이 컬컬해 와서 술 생각이 간절한데, 혹시 이 부근에 술집이 어디 있는지 아시요?」
하고 물어 보았다.
자칭 백수 건달이라는 사람은 <술>이라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드는지. 왕방울 같은 눈알을 대번에 희번덕거리며 입맛부터 다신다.
「술집이오? 술집이라면 염려 마시오. 저기 보이는 고개를 넘어 가면 연연 (然然)이라는 술집이 있다오. 술맛이 기가 막힐 뿐만 아니라 안주도 천하일품이지요.
「저 고개 너머에 그렇게 좋은 술집이 있는가요.」
「있구 말구요. 술맛이 기가 막힐 뿐만 아니라, 안주가 천하 일 품이라니까 그러네요.」
백수 건달은 그렇게 말하며 또 한번 입맛을 쩍 다시는 것이있다.
김삿갓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노형도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시는 모양이구료.」
「아따, 사내대장부치고 술 싫어하는 사람 보셨소. 돈이 원수라서 그 좋은 술을 못 먹고 밤낮 촐촐하게 지낼 뿐이지요.」
「그러면 내가 한잔 살 테니 같이 가주시려오?」
백수건달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서면서,
「돈은 넉넉하시오?」
하고 호주머니 걱정부터 해준다.
「돈은 걱정 말고 같이 갑시다.」
「그럼 나를 따라오시오.」
백수건달은 지게와 낫을 그냥 내버려둔 채 앞장서서 걸어 나간다.
백수건달이 술에 미쳐서 지게조차 잊어버리고 가는가 싶어, 김삿갓은 뒤따라오며,
「지게는 버려 두고 가려우?」
하고 깨우쳐 주었다.
그러나 백수 건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걸어나가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술을 먹으러 가는 판인데, 그까짓 지게는 지고 가서 뭘하오.」
「그러다가 누가 가져가 버리면 어떡하죠?」
「아따, 그 양반 걱정도 팔자네. 그냥 내버려 두기로 지게를 누가 가져 가오. 어서 나를 따라오기나 하시오.」
술을 누가 사고 누가 얻어먹는 사람인지, 백수건달은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별세계(別世界)에 온 듯한 흥미를 느끼며 부지런히 뒤를 따라 걸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산 아래로 따라 내려오니, 산모퉁이에 <然然>이라는 초라한 주막이 나온다.
백수건달은 술집 안마당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뭇 호기로운 어조로 주인을 부른다.
「연연 아줌마 계시오?...... 내가 오늘은 손님을 한 분 모시고 왔소. 술은 넉넉하겠지.」
주모는 목소리로 사람을 알아보았는지, 문도 열어 보지 않고 짜증스럽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아이구머니! 백수 건달이 또 왔는가 보구먼. 오늘은 아직 마수걸이도 못 했는데 마수걸이 외상을 먹겠다는 말인가. 제발님. 오늘만은 그냥 돌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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