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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소설의 마지막 장면들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3. 3. 10:46


   🙈 인생 소설의 마지막 장면들


십년 전인 내가 나이 육십쯤 됐을 때였다. 연락이 뜸했던 중고등학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퇴직을 한 후 동창 누구 한테도 연락을 하지 않고 살았어. 그러다가 부탁을 하려고 생각해 봤는데 그래도 너 밖에 없었어.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해. 지금 천안 원룸에 월세를 살고 있어. 집사람과 둘이 사는 데 돈이 필요해. 배운 기술은 없고 일자리 좀 알아봐 줄 수 없을까?”

나는 그의 노년 팔자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모든 걸 갖춘 것 같아 보였었다. 

미남에 부자집 외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서울 변두리에 넓은 과수원 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땅이 개발이 되어 수백억원이 넘는 가치가 됐다.

우리는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고 명문으로 불리던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명문은 출세와 삶의 안정을 보장하는 사다리로 여기던 시대였다. 

학교에서 아이큐 검사 결과를 공개 했었다. 그는 아이큐 테스트에서 만점으로 학교에서 머리가 제일 좋았다. 

그는 대기업에 들어가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날개가 꺽여 절벽 밑바닥까지 추락한 것이다. 

그에게 잘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친구 보증을 서줬다가 빚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는 보증이었다. 

인간의 운명이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직장을 나와야 했고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도 그는 평생 도망자 신세였다. 그게 바로 내 운명일 수도 있었다. 

그에게 보증을 부탁한 친구는 그 먼저 나를 찾아와 부탁했었다. 나는 보증은 거절하고 대신 돈을 꾸어 주었었다. 행복과 불행은 순간에 갈렸다. 그는 왜 불행하게 되고 나는 그렇지 않은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수 많은 동창들의 애환을 보았다. 퇴직과 동시에 인생 한 등급이 강등되는 것 같았다. 

대기업 임원에서 택시 기사나 건물경비로 직업이 바뀌었다. 명문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취직이 되지 않았다. 중졸 정도로 이력을 속이고 일자리들을 얻는 것 같았다. 거기서 다시 한단계 아래로 내려가기도 했다. 

노인 백수로 있거나 뇌졸증으로 요양원에 들어 가기도 했다. 
감옥에 들어간 친구들을 몇 명 무료로 변호한 적이 있었다. 

그중 한 친구의 부인은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와 이렇게 한탄했다.
“똑같이 명문학교를 나왔는데 왜 우리 남편은 이래요?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못 살죠?”

명문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괴로움의 원인이 됐다. 그녀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부자이고 화려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가난한 집 출신인 나는 정직한 노동으로 번 돈으로 검소한 생활을 할 정도였다. 그나마 그런 생활을 위해서 내가 한 수고를 그녀는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 시대 성공이라고 하면 명문 학교를 나와 대기업에 가거나 전문직이 되는 것이었다. 대기업 사장이 성공의 표본이기도 했다. 고교동기가 재벌그룹 해운회사의 사장이었다. 

그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대기업 종합상사에 들어가 38년간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어. 그러다 직원 8천 명인 해운회사의 사장이 됐지. 재벌인 오너들은 전문경영인을 믿지 못하더라구. 돈을 빼먹거나 뒷통수를 칠거라고 의심하지. 

오너는 명문학교 출신인 나를 최소한 도둑질은 하지 않을 거라고 보고 사장을 시키더라구. 사장을 하면서 새로운 괴로움에 봉착했지. 

오너가 회의를 할 때 마음에 들지않거나 해외에 나갔을 때 안내를 잘하지 못한 임원을 사장인 나에게 당장 잘라버리라고 명령을 하는 거야. 그런 사람을 내보낼 때 나는 고통스러웠어. 

명문학교를 나오고 대기업을 다녀서 자랑해도 결국 부잣집 머슴 같은 운명이지. 

사장이 되어 일년 매출을 10조 이상 올려야 했어.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매주 2백억씩 오히려 손해가 나는 거야.

식은 땀이 났지. 밤에 잘 때 기도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면서 버텼는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더라구. 결국 쫓겨났지.”

한 드라마에서 대기업 사원이 목에 건 신분증을 비정규직에게 보이면서 말하는 걸 들었다. 어려서부터 학원 가고 과외 공부해서 명문 학교 졸업장을 얻은 결과물이라고 했다. 

오늘도 나의 손자 손녀는 학원을 가고 독서실에서 밤 늦도록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명문대학이 목표다. 손녀는 대학을 졸업한 후 우주 항공회사에 가고 싶다고 하고 손자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회사에 가고 싶다고 한다.

할아버지인 나는 인생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은 셈이다. 명문 학교를 목표로 하는 게 정말 행복을 위한 길일까. 어린 시절 멀리서 숲을 보고 아름답다는 환상을 가졌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다행히 그 숲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잔설 옆에 무심히 서 있는 나무들 사이에 그냥 서 있는 것 같았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숲 안에는 불에 타 숯이 된 나무도 있고 수액이 다 빠져 쓰러져 버린 나무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본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체험을 말해주고 싶다. 판단은 손녀와 손자에게 맡기고.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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