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19 회
아들 내외는 좌우에서 어머니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혔다.
이씨 부인은 일어나 앉아서도 아들의 얼굴만 바라볼 뿐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열어 명령한다.
「너는 밖에 나가 거적 한 장만 가지고 들어오너라.」
「거적이라뇨? 거적을 무엇에 쓰리고 그러십니까.」
「네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조상님 전에 석고 대죄 (席藁待罪)를 해야 할 게다.」
「석고대죄라뇨?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조상님께 석고대죄를 시키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이씨 부인은 울화통이 터져 오른 듯 별안간 벼락 같은 호통을 지른다.
「거적을 가져 오라면 당장 가져 올 일이지, 죄를 지은 놈이 무슨 잔소리냐.」
김병연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거적을 가지러 밖으로 달려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온 김병연은 이 구석 저 구석으로 거적을 찾아다니며 혼자 생각해 본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어머니는 그렇게도 노여워하시는 것일까.)
그러자 문득 번개같이 머리에 떠오른 일이 있었다.
(지난번에 어머니는 나에게 <우리 가문을 다시 일으켜 달라>고 간곡히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 오늘의 분노는 그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았으나, 그 이상은 알 길이 없었다.
이윽고 거적을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와 보니, 어머니는 바람벽을 향하여 꿇어앉은 채 두 손을 모아 잡고 깊은 비통에 잠겨 있었다.
「어머니! 거적을 가져 왔읍니다.」
이씨 부인은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비켜 서더니 엄숙하고도 비장한 어조로 명령한다.
「지금 에미가 앉아 있던 이 자리에 거적을 깔고 꿇어 앉아라. 여기가 바로 우리 가문의 사당(祠堂)문 앞이다」
김병연은 어리둥절하셨다.
「여기는 바람벽뿐인데 사당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차차 알게 될 테니 군소리 말고 내 말대로 하거라.」
이씨 부인의 말은 어디까지나 비장하면서도 엄숙하였다.
김병연은 어쩔 수 없어 바람벽을 향하여 가격 위에 꿇어앉았다. 이씨 부인은 옆에 서 있는 며느리에게 말한다.
「너도 우리 가문의 비통한 역사를 네 남편과 함께 처음으로 알게 될 것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듣도록 하거라.」.
그리고 이번에는 아들에게 다시 말한다.
「오늘날까지 이 에미는 우리 가문의 사당을 아무도 모르게 혼자 모셔오고 있었다. 집안에 사당을 모셔 오면서 무엇 때문에 자식들에게까지 숨겨 왔는지 그 이유는 차차 알게 될 것이나 우선 사당을 공개하겠다.」
이씨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바람벽에 따로 발라 놓은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리니, 그 밑에서 조그만 벽장문(壁欌門)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벽장문에는 <장동김씨가묘(壯洞金氏家廟)>라는 여섯 글자가 선명하게 찍어 있었다.
김병연은 <가묘>라는 글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우리 집에서는 이런 사당을 언제부터 모셔 왔읍니까. 집 안에 사당이 있다면 저희들한태는 무슨 이유로 숨겨 오셨습니까.」
이씨 부인은 울음을 참느라고 한동안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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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20 회
「모두가 허망하게 된 이 판국에 이제 무엇을 숨기겠느냐. 이 에미는 네가 과거를 보아 장원 급제라도 하면, 그때에 가서 너에게 이 사당을 공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너는 네 조상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그 이상은 목이 메어 흐느껴 울기만 한다.
김병연은 자기 집안에 사당이 있는 것을 무엇 때문에 숨겨 왔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알 길이 없었다.
「어머니! 사당이라는 것은 어느 집에서나 모셔 오는 떳떳한 것이라고 알고 있읍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 집에서만은 사당이 있는 것조차 숨겨 오고 있었읍니까.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씨 부인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눈물 어린 목소리로 대답 한다.
「남의 가문처럼 떳떳한 사당이었다면 왜 너희들에게 숨겨 왔겠느냐. 그 이유는 차차 알게 될 것이지만, 너는 조상님께 죽을 죄를 지었으니 우선 석고 대죄를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이씨 부인은 조그만 벽장문을 열고 신주(神主) 일위(一位)를 조심스럽게 보서 내어 아들에게 보여 주는데, 그 신주에 씌어 있는 신주문은 다음과 같았다.
〈顯祖考 宣川防禦使金益淳 府君 神位 (돌아가신 할아버님 선천 방어사 김익순 어른의 신주)〉
김병연은 그 신주문을 읽어 보는 순간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아니, 홍경래에게 비겁하게 항복한 선천 방어사 김익순이 저의 집 할아버지였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이씨 부인은 별안간 벼락 같은 호통을 지른다.
「말버릇을 삼가거라. 너의 조부님이 아무리 국가의 죄인이셨기로 조부님의 함자를 함부로 불러 던지는 후레자식이 어디 있단 말이냐」
김병연은 철통 같은 질책에 전신을 찔끔하면서,
「지금까지 조부님의 함자를 무(武)자 곤(坤)자라고 말씀해 온 것은 어떻게 된 일이웁니까.」
「그것은 너희들을 속이기 위한 가짜 함자였었다.」
하고 실토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나저러나 만고의 역적이라고 믿어 왔던 선천 방어사 김익순이 자기 자신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만은 암만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선천 방어사가 우리 집 조부이셨다구요? 어머니께선 뭔가 잘 못 알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씨 부인은 흐느껴 울며 한동안 말이 없다가,
「너는 이 에미의 말이 그렇게도 믿어지지 않느냐. 하기는 사당을 비밀히 모셔 온 것도 너희들에게만은 욕된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저의 할아버지는 결코 그런 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김병연은 너무도 치욕적인 역사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앙탈이라도 하듯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이씨 부인은 새삼스러이 한숨을 쉬며,
「네가 믿고 싶지 않아 하는 심정을 이 에미는 충분히 이해하겠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 에미가 말한 그대로니다. 우리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승(家乘)이 있다. 그것을 보면, 너도 아니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벽장처럼 되어 있는 사당 속에서 가승책을 꺼 내 오는 것이 아닌가.
(가승)이라는 것은 그 집의 계보(系譜)와 사적(史蹟)을 기록해 놓은 일종의 〈가족사(家族史)〉 같은 것이다.
이씨 부인은 사당에서 가승을 꺼내 아들에게 내밀어 주며 말한다.
「이것은 우리 집의 가승이다. 방어사 어른과 너와의 관계 네 손으로 직접 찾아 보아라.」
김병연은 가승을 면밀히 뒤져 보기 시작하였다.
가승에는 수십 대를 이어 내려오는 조상들의 계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끝판에 와서 김익순과 자기와의 관계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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