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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31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3. 31. 14:59

방랑시인 김삿갓 1-31 회

김병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취용 노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김익순의 후손> 운운하는 말을 자꾸만 되씹어 말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

「선생은 젊은 놈에게 거짓말을 그만하시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요.」

취옹 노인은 점점 괴상한 얼굴이 되면서,

「이 사람아!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말인가. 자네는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네그려. 대관절 내가 자네의 무슨 비밀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하고 정색을 하며 반문하였다.

어시호 김병연은 난처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얼른 이렇게 반문 하였다.

「나는 지금 모모한 일로 번민을 하고 있노라고 선생에게 말씀하였소. 그런데 선생은 내가 번민하는 일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은 한마디도 물어 보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것은 어떻게 된 일이오.」 
「이 사람아! 자네가 번민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았으면 그만이지. 구체적인 내용까지 물어 볼 필요가 뭐란 말인가.」
「어째서 구체적인 내용을 물어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오.」

취옹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너털웃음을 웃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아직 나이가 어려 잘 모르겠지만, 인생을 한 70여 년 살고 나서 보니, 사람이 번민하는 내용이라는 것은 대개가 그렇고 그런 것이야. 그러니까 남의 번민을 덜어 주려거든 원칙적인 말만 들려주었으면 그만이지, 구체적인 내용 같은 것은 알아볼 필요도 없는 것이야. 사람이 번민하는 원인은 대개가 대동 소이 (大同小異)한 것인데, 그런 것을 일일이 알아볼 필요가 뭐란 말인가. 어떤 번민을 막론하고, 번민이라는 것은 마음의 안정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만 안정시켜 주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야.」

「그렇다면 선생은 어찌하여 김익순의 후손 얘기를 자꾸만 끄집어 내셨소? 그것이야말로 김익순이 나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김병연은 김익순과 자기와의 관계를 무심중에 자기 입으로 토로해 버리고 말았다.

취옹 노인은 그 말을 듣자 까무라칠 듯이 놀란다.

「뭐야? 김익순이 자네 할아버님이시라고? 그러면 자네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 조부를 무참하게 후려때렸더란 말인가?」 

김병현은 그와 같은 질문을 받자, 자기도 모르게 몸부림을 치 더 괴로워하였다. 취옹 노인은 김병연을 그 이상 건드릴 생각은 아니하고,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음, 그런 관계였었구먼 김익순이 할아버님인 줄도 모르 고 역적으로 몰아붙여 난도질을 해놓았으니, 일은 크게 벌어진 셈인걸. 이미 엎질러 버린 물이니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윽고 취옹 노인은 김병연에게 술을 권하며 달래듯이 말한다. 

「복수는 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고, 이미 엎질러 놓은 물을 다시 주위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니 만사 체념하고 술이나 먹세」

김병연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취옹 노인에게 애걸하듯 말한다.
「제가 조상에게 저지른 죄를 어떡하면 좋겠읍니까.」

취옹 노인이 조용히 대답한다.

「〈천작얼은 유가위(天作孼 猶可違)나 자작얼은 불가활(自作蘖不可活)>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천재(天災)는 노력하면 피할 수 있어도, 사람이 저지른 재앙(災殃)은 막아 낼 수가 없는 법이네. 자네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응당 벌을 받아야 하겠지.」

김병연은 다시 술을 들이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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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32 회

「어떤 벌을 받아야 할지 신생에서 가르침을 내려 주소서.」
「내가 신이 아닌 바에야 난 어떻게 알겠는가.」
「저는 죄가 너무도 중해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자네는 부모님이 계실 게 아닌가.」
「어머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자결은 또 하나의 죄를 범하는 셈이야.」
「죽지도 못한다면 저는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그 괴로움, 그게 바로 자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야.」

김병연은 또다시 술을 들이켜며,

「앙불괴어천 (仰不愧於天)이라고 하는데, 저는 죄가 너무도 중해 하늘을 우러러볼 수도 없게 되었으니, 그러고서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취옹 노인은 소리 내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을 우러러보기가 부끄러우면 상제 모양으로 삿갓쓰고 다니면 될 거 아닌가. 하하하.」

김병연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네? 삿갓을 쓰고 다니라구요?」
「하늘을 우러러보기가 부끄럽다니까 삿갓을 쓰고 다니라고 할 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면 하늘을 직접 우러러보지 않고도 살아 갈수 있을게 아닌가.」

삿갓을 쓰고 살더라도 죽지는 말라는 기상천외한 착상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김병연은 불현듯 어머니의 말씀을 연상하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는 말라고 애원하시던 바로 그 말씀이었다.

(삿갓을 쓰고 살더라도 살기는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김병연이 고민에 잠겨 있는데, 취옹 노인이 무심코 암시적인 말을 한마디 또 던진다.

「한평생 삿갓을 쓰고 팔도강산을 한 조각 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도 하나의 풍류적인 인생행로가 될 수 있을 걸세. 모든 화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 영욕(辱)을 해탈하고 나면, 수불파즉자정(水不波則自定)이요 즉경불예즉자명(鏡不翳則自明)이라 거기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 걸세」

취옹 노인이 한평생 삿갓을 쓰고 팔도강산을 구름처럼 정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도 매우 운치 있는 인생행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어쩌면 취중의 주정 (酒酊)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김병연에게,

「나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산수간을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데 있다《(醉翁之意不在酒,在乎山水之間也).」(취옹지의부재주,재호산수지간야)

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취옹 노인의 말을 단순한 주정으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서, 취옹 노인은 자기가 이루지 못한 포부를 김병연더러 대행(代行)을 해주었으면 싶은 마음에서 무심 중에 그런 말을 지껄인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김병연 자신은 이제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속죄의 생을 살아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기에 취옹 노인의 암시적인 말에 무척 구미가 통하여 이렇게 물어 보았다.

「선생 말씀대로 모든 욕망을 포기해 버리고 한 조각 구름처럼 돌아다니기만 하면 속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취옹 노인이 대답한다.

「그야 물론이지. 애시 당초 자네가 조상에게 죄를 범하게 된 것은 출세를 하려고 남을 함부로 짓밟고 일어서려는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모든 욕망을 초월한 기세인(棄世人)이 되어 버리면, 기세인에게 누가 무슨 시비를 걸어 올 것인가.」

김병연은 <기세인>이라는 말에 형용하기 어려운 매력을 느꼈다. 

「선생 말씀대로라면, 저는 이제 앞으로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으리라는 말씀이지요?
「허허허. 내 말이 그런 뜻이 되는가.」

취옹 노인은 너털웃음을 웃어 버리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