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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65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4. 17. 16:37

방랑시인 김삿갓 1-65 회

「이제 알고 보니 네가 보통내기가 아니로구나. 풍헌댁에서 진사댁 규수를 며느리로 맞아 온다면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혼인임에는 틀림이 없겠지. 그러나 진사 영감이 너희들의 혼인을 응낙해 줄 것 같으냐」
「저희가 지체는 낮지만 돈은 많고, 진사댁은 가난한 편입니다. 그러니까 당사자끼리 마음만 맞으면 결혼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하하, 네가 아주 육조 배판(六曹配判)을 다 하고 있구나. 그처녀가 그렇게까지 마음에 든다면 소원 성취하도록 노력해 보아라.」 
「그러자면 이제 앞으로도 선생님의 도움이 꼭 필요할 것 같사오니 잘 부탁드리옵니다.」
「무슨 소리냐. 내가 왜 남의 집 혼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겠느냐. ......나는 몸이 고단해 일찍 자야 하겠다. 그만 돌아가 보아라.」

김삿갓은 조 소년을 억지로 쫓아 보내고 자리에 누워 버렸다. 훈장은 초저녁에 풍헌 영감과 함께 나간 채 밤이 깊어도 돌아 오지 않는다.
김삿갓은 늘어지게 자고 나서 깨어 보니, 날이 환히 밝았는데 훈장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텅 비어 있는 서당방에 혼자 앉아 애꿎은 담배만 피우고 있노라니까, 생각지도 않았던 조 풍헌 영감이 새벽같이 찾아온 것이 아닌가.

「아니, 풍헌 영감께서 새벽같이 웬일이십니까....훈장 선생은 어제 영감님과 함께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읍니다.」

풍헌 영감은 어제와는 딴판으로 김삿갓에게 머리를 정중하게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나는 학장 선생을 찾아온 것이 아니고 삿갓 선생을 찾아온 것 입니다.」
「네? 나를 찾아오셨다구요? 무슨 일로 나 같은 사람을?.........」

풍헌 영감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 마주 앉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실은, 어젯밤 자식놈한테서 자세한 이야기를 다 들었읍니다. 내 자식이 현진사댁 규수와 만날 수 있는 길을 선생께서 열어 주셨다니, 세상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읍니까.」

김삿갓은 조 풍헌 영감의 지나치게 정중한 인사가 오히려 송구스러울 지경이었다.

「영감님께서는 자제분을 통해 모든 사연을 죄다 들으신 모양이 군요. 그러나 그런 하찮은 일을 가지고 무얼 일부러 찾아오시기 까지 하셨읍니까.」

그러자 조 풍헌은 고개를 힘차게 가로 저으며 말한다.

「하찮은 일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집 아이로 말 하면, 내게는 하나밖에 없는 만득자(晩得子)입니다. 내가 막대한 돈을 내놓아 서당을 설립한 것도 실은 자식놈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답니다. 그 아이가 벌써 열네 살이 되었기에, 진작부터 장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땅한 혼처가 없어 미루어 오고 있던 중이었지요. 그런데 선생께서 우리 집 아이가 현 진사 댁 규수와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니, 세상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읍니까.」

조 소년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풍헌 영감은 현 진사댁 규수를 며느리로 맞아 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웃으면서 대답한다.

「나는 그 까다로운 편지 사연을 풀어 주기만 했을 뿐이지,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읍니다.」
「누구도 모르는 편지 사연을 알아내시어, 당사자들이 직접 만 날 수 있게 해주신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두 사람이 정말로 만나게 될는지 그것은 오늘 저녁까지 기다려 봐야 할 일입니다.」
「그건 그렇습지요. 그러나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편지를 정확하게 풀이해 주신 일만으로도 선생의 은혜는 망극 무비(罔極無比) 합니다. 부모된 입장으로서는 자식놈의 그러한 은혜를 어찌 모르는 척할 수 있으오리까. 그래서 저의 집에 간략한 조반 준비를 해놓고 선생을 집으로 모셔 가려고 온 것입니다.」

김삿갓은 예기치 않았던 조반 초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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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66 회

「그런 일로 무슨 조반까지 초대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선생을 모시고 조반을 같이하면서, 금후의 일에 대해서도 선생의 고견(見)을 꼭 들어 보고 싶사옵니다.」
「기어이 조반을 주신다면 가기는 가겠읍니다. 그러자면 훈장 선생도 같이 모시고 가야 할 게 아닙니까.」

김삿갓이 그렇게 말하자, 풍헌 영감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학장 선생은 걱정하실 것 없읍니다. 실은 이제니 말씀인데, 학장 선생은 지금쯤 원앙 금침 속에서 백년 해로의 단꿈에 잠겨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너무도 뜻밖의 대답에 김삿갓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랐다. 

「아니, 원앙 금침 속에서 백년 해로의 단꿈에 잠겨 있다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김삿갓은 그렇게 반문하며 내심으로는, 훈장이 혹시 어느 집 과부를 소실로 유인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싶었다.

시골 훈장들이란 음흉스럽기 짝이 없어, 순진한 과부들을 교묘한 수단으로 꾀어다가 소실을 삼는 일은 어디서나 흔히 보아 오는 일이다. 성미재의 훈장도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닌가 싶어, 김삿갓은 내심 매우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풍헌 영감은 그런 눈치를 채었는지 얼른 이렇게 말한다.

「학장 선생이 오랫동안 홀아비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기에, 어젯밤 제가 속현(續絃)을 시켜 드렸답니다.」
「에?...............그분이 홀아비였든가요?」
「물론이지요. 우리 마을에 마침 얌전한 과수댁이 하나 있기에, 내가 중간에 나서서 인연을 맺어 준 것이지요. 사내들이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마누라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홀아비라면 물론 속현을 해야겠지요. 그런 줄 알았으면 나도 축하의 인사를 올릴걸 그랬소이다.」
김삿갓은 그렇게 말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훈장이 풍헌영감을 신주 단지처럼 받들어 모시던 까닭을 이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김삿갓은 풍헌 영감을 따라 그의 집에 도착하였다.

풍헌 영감네 집은 마을 한복판에 있는 고래등 같이 큰 집이었 다. 시골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호화판 주택인 것으로 보아 돈이 많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얼마 후에 조반상이 나오는데, 상 위에는 산해 진미가 그득하였다.
그러나 술이 없는 것만은 천만 유감이었다.

「아무것도 차린 것이 없읍니다마는 많이 드십시오.」

김삿갓은 웃으면서 대답한다.

「차린 것이 없다면서 무엇을 먹으라는 말씀입니까. 차린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으니 내게는 술이나 한잔 주면 고맙겠읍니 다, 하하하.」

풍헌 영감도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하인들을 꾸짖는다.

「여봐라! 너희들은 술을 안 내오고 무엇하고 있느냐.」

그리고 김삿갓에게 말한다.

「서울에서는 정수동(鄭壽銅)이라는 사람이 익살을 잘 부린다고 들었는데, 삿갓 선생은 정수동이를 뺨칠 정도로 익살이 능하십니다그려.」
「일개의 낙백객(落魄客)에 불과한 사람을 정수동에 견주어 주시니, 안팎으로 면구스러운 일이올시다.」
「내가 워낙 무식하여 말로는 선생을 당해 낼 길이 없읍니다그려. 자, 술을 한잔 드시지요. 이 술은 감로주올시다.」
「이런 좋은 술을 마시면 입술이 부르트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익살을 부려 가며 한잔 마셔 보니, 과연 입안에 향취가 진동 오는 것이 아닌가.

「커어...과연 좋은 술이올시다. 내가 오늘은 사주에도 없는 팔자를 누리는가봅니다. ......그건 그렇고, 자제분이 보이지 않으 니 웬일입니까.」

득남이라는 아이가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므로, 김삿갓은 지나가는 말로 물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