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89 회
「몇 해 전까지는 장안사(長安寺)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그 절에 있는지 모르겠읍니다. 법명은 <경봉(峯)>이라고 합니다.」 「경봉 스님? ..... 지금 나이는 몇 살쯤 되셨는가요?」
「나보다 열두 살이 더 많으니까 쉰 대여섯 살쯤 되셨을 거예요.」
마침 그때 며느리가 저녁상을 들고 들어온다. 소반 위에 놓여 있는 밥은 옥수수와 감자밥이고, 반찬은 도라지 나물과 고사리 무침 등등...... 순전히 산채뿐이었다.
게다가 밥그릇이 없는 탓인지, 노인과 김삿갓의 밥은 제각기 사발에 담아 소반에 놓아 왔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먹을 밥은 하나의 바가지에 담아다가 방바닥에 덜렁 내려놓는다.
주인 노인은 겸상으로 차려 온 밥상을 김삿갓의 턱밑에까지 바짝 내밀어 놓고 수저를 들며 말한다.
「반찬은 없어도 밥은 많소. 밥이라도 많이 자시오. 산길을 걸어오느라고 얼마나 시장했겠소.」
「고맙습니다. 염치없이 잘 먹겠읍니다.」
김삿갓은 몹시 허기졌던 판인지라, 비록 옥수수밥이라도 입에 넣기가 무섭게 슬슬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입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어, 조 풍헌 댁에서는 진수성찬에 물려 버릴 지경이었건만, 하루를 굶고 나니 옥수수밥도 꿀맛 같았던 것이다.
「노인장님! 옥수수밥이 각별히 맛이 좋은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밥만은 많으니까 얼마든지 자시오.」
그러나 밥이 많다는 것은 말뿐이었지, 알고 보면 밥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많지도 않은 밥을 많다고 과장해 가면서 많이 먹으라고 알뜰살뜰하게 권하는 그 인정이 또한 고맙기 그지 없었다.
그날 밤은 다섯 명이 한방에서 자려니까, 부득이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김삿갓은 새벽녘에 어렴풋이 잠을 자다가, 주인 노인과 아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기가 막혔다.
그들은 김삿갓이 아직도 자고 있는 줄 알았는지, 다음과 같은 말을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손님이 가시고 나거든, 내가 장에 가서 나무를 좀 팔아 와야 하겠다. 그러자니 네가 입고 있는 옷은 나를 벗어 주고 너는 내 옷을 입어야 하겠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와 아들은 어둠 속에서 옷을 서로 바꿔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젯밤에는 밥그릇이 없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밥을 바가지에 퍼다 놓고 먹더니, 나들이를 할 때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옷을 서로 바꿔 입곤 하는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그들의 가난이 너무도 측은하게 여겨졌다. 그리하여 눈을 감고 자는 체해 가면서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한수 지었다.
밥상엔 고기 없어 채소가 판을 치고
부엌엔 땔감 없어 울타리가 녹아난다
며느리 시어미는 한그릇 밥 나눠 먹고
나들이엔 부자간에 옷을 바꿔 입네.
盤中無肉權歸采 (반중무육권귀채)
厨中乏薪禍及籬 (주중핍신화급리)
婦姑食時同器食 (부고식시동기식)
出門父子易衣行 (출문부자역의행)
그처럼 군색하게 살아가면서도 주인 할아버지는 남을 도와 주려고 성심 성의껏 애를 쓰고 있으니, 주인 할아버지야말로 틀림 없는 생불(生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조반 후에 김삿갓은 길을 떠나게 되자,
「이것은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나의 정성으로 알고 받아 주시오.」
하고 말하며 주인 아들에게 돈 열 냥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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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90 회
그러자 주인 할아버지가 펄쩍 뛰면서,
「지나가던 나그네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하고 돈을 받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김삿갓을 그냥 떠날 수는 없어, 돈을 방바닥에 내던지고 도망이라도 치듯 달려나와 버렸다.
사람의 마음은 묘하게 생겨 먹어서 누구나 남한테서 받기는 좋아하지만, 남에게 주기는 싫어하는 법이다. 그러한 마음보가 바로 <욕심(慾心)>이라는 것이다. 모든 분쟁은 그 욕심을 채우려는 데서부터 일어나게 된다.
김삿갓은 얼마 안 되는 노자 중에서 열 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내준 셈이었다. 그러나 이 날만은 남에게 준다는 것이 그렇게도 기쁜 일일 줄은 몰랐다.
불교에는 <법열(法悅)>이라는 말이 있다. 설법(說法)을 듣고 진리를 깨달았을 때의 기쁨을 법열이라고 한다.
김삿갓은 그 노인에게서 아무런 설법도 들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무한히 자비롭던 그 노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언의 설법이 되어, 김삿갓에게 법열을 느끼게 해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도 그 할아버지를 본받아 욕심 없는 인생을 살아가자. 그 할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남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 주고 있지 않았던가.)
김삿갓은 불현듯 어렸을 때 명심보감(明心寶鑑)》이라는 책에서 배운 과욕즉보신 (寡慾即保身)>이라는 말이 연상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노자(老子)도 그의 《도덕경(道德經)》에서, <욕심이 많으면 몸을 상하게 되고, 재물이 많으면 몸이 번거롭게 된다(慾多傷身 財多累身)>고 말하고 있었다.
욕심을 떨쳐 버리고 나니, 하늘이 더욱 넓어 보이고 산천초목이 더욱 아름다와 보였다.
(눈앞에 전개되는 삼라만상이야말로 하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보물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산길을 걸어가고 있노라니까, 높푸른 하늘가에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유유히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독수리는 잠깐 사이에 저 산에서 이 산으로 날아오다가, 별안간 일직선으로 급강하를 하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토끼 한 마리를 움켜잡아 가지고 유유히 저쪽 산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그 광경을 보고 시가 없을 수 없었다.
넓은 하늘을 지척처럼 날아가며
이 산 위에 번쩍 저 산 위에 번쩍
숲속의 토끼잡이가 어찌나 웅장한지
오관을 넘나드는 관운장만 같구나.
萬里天如咫尺間 (만리천여지척간)
俄從某峯叉玆山 (아종모봉우자산)
平林搏兎何雄壯 (평림박토하웅장)
也似關公出五關 (야사관공출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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