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97 회
「검은 소보다는 누렁 소가 일을 더 잘한다오.」
하고 속삭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말을 하필이면 왜 나의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속삭이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 농부는,
「검은 소가 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섭섭해 하겠소. 소가 들을 까봐 일부러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이오.」
하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술집 주모가 김삿갓을 호되게 나무란 것도 그 일화와 맥락을 같이하는 말이기에 김삿갓은.
(이 노파는 보통 노파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게딱지라고 말한 것은 내가 실언했소이다. 정식으로 사과할 테니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마시오.」
하고 고개를 수그려 보였다.
주모는 그게서야 빙긋 웃으며.
「내가 늙은 것만 믿고 손님한테 말버릇이 지나치게 불손했던 것 같구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술을 한잔 대접하고 싶소이다.」
하며 술을 한잔 따라 주는 것이다. 알고 보니 말이 얼마든지 통할 수 있는 노파였다.
「주모는 혼자 사시는 모양인데, 자녀가 한 명도 없으신가요?」
「자식이 없기는 왜 없겠어요. 아들이 자그마치 일곱 명이나 있다오」
「엣?......... 아들딸이 일곱 명이나 있다구요? 그런데 자식들은 죄다 어디를 가고 혼자만 산다는 말이오?」
「더러는 중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또 제 애비를 찾아가기도 하고, 계집애는 사내놈과 배가 맞아 도망을 쳐버리기도 하고..... 결국 사람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것인가 봅니다.」
말만 들어서는 처량하기 짝이 없지만, 주모는 모든 것을 달관한 듯 태연하기만 하였다.
김삿갓은 주모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러는 애비를 찾아가다뇨? 그렇다면 영감님은 죽은 것이 아니고 딴 집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요?」
주모는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아니지요. 내가 팔자가 워낙 기박해, 열아홉 살에 아들 형제를 물려 가지고 청상 과부가 되었다오. 부득이 개가하여 이번에는 남매를 낳았는데, 두번 째 서방이 또 죽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다시는 시집을 안 가기로 결심했다오. 그러니까 이번에는 아들 없는 부자 영감님이 나를 찾아와서 돈을 많이 줄 테니 아들을 하나만 낳아 달라는 거예요.」
「소실로 데려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아들만 낳아 달라는 말인가요?」
「물론이죠. 아이가 넷이나 달려있는 과부를 누가 소실로 데려 가겠어요. 나 역시 죽으면 죽었지, 남의 집 소첩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면 돈 받고 아들 낳는 기계 노릇만 해달라는 말이었군요.」
「이를테면 그런 셈이지요. 아들 하나를 낳아 두 돐 만에 곱게 들려주었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영감님이 찾아와서 아들 딸간에 하나만 낳아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누구의 부탁은 들어주고 누구의 부탁은 거절하기가 안 되어, 결국은 그런 식으로 남의 아이를 셋이나 낳아 주었다오.」
몇 천년 전의 신화(神話)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주모는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이 담담하게 털어놓는 것이었다.
물론 자식을 넷이나 거느리고 혼자 살아가기가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남의 아이블 셋이나 낳아 주었을 것인가.
아무렇거나 남의 아이를 낳아, 두 돐이 될 때까지 정성스럽게 키워 가지고 꼬박꼬박 돌려주었다는 것은 부처님 같은 자비심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생불을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숙연해 오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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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98 회
「아니 그럼, 세 사람이 모두 자식만 낳아 가고 같이 살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오!」
「그런 사람인들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해주는 첩살이는 하고 싶지 않아 모두 거절해 버렸다오.」
팔자를 고칠 기회가 얼마든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독신으로 살아오는 것을 보면, 본바탕이 음탕한 여자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러면 두 남편 몸에서 낳은 네 남매는 어디를 가고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는 말이오.」
「아들 셋 중에서 둘은 스님을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버렸고, 나머지 한 아이는 호랑이한테 물려 갔는지 집을 나간 채 영영 종적을 모르고, 하나밖에 없는 계집아이는 어떤 놈팽이와 배가 맞아 도망을 갔다오. 지금은 함훙(咸興)에서 기생질을 한다 는 소문이 들려 오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김삿갓은 <기생>이라는 소리에 흥미가 느껴져서,
「함흥에서 기생 노릇을 한다구요? 나도 함흥에 가면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이름을 뭐라고 하지요?」
하고 물어 보았다.
주모는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지, 심드렁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한다.
「집을 나간 지 하도 오래 되어, 이제는 이름조차 잊어버렸는가 보오. 어렸을 때에는 가실 (可實)이라고 불러 왔지만, 기생이 되고 나서는 이름을 뭐라고 바꿔 버렸는지 모르지요.
김삿갓은 옷을밖에 없었다.
「모녀간의 정리(情理)가 그럴 수가 있어요. 지금도 가끔 보고 싶기는 하겠죠?」
「솔직이 말해 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품안에서 떠나 버리면 자식도 남이나 다름이 없는걸요.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구별하게 되면 걱정도 생기고 번뇌도 일어난다면서요? 부처님은 중생을 한결같이 제도해 주시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인생철학인 모양이었다.
「아주머니는 생활 신념이 그처럼 뚜렷한 걸 보니 보통분이 아니오........자, 그런 의미에서 기분 좋게 한잔 마십시다.」
김삿갓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데, 문득 문이 벌컥 열리더니 40세가량 되어 보이는 사람이 대청 마루에 털썩 걸터앉으며,
「아주머니! 나 술 한잔 주소.......제길헐! 계집년들 등쌀에 사람이 살 수 있어야 말이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주모가 얼는 술을 따라 주며 묻는다.
「계집년들이 뭐가 어쨌다고 혼자 화를 내시우?」
김삿갓은 그 기회에 사나이의 용모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이 마흔이 되었을까 말았을까, 몸이 우람하고 상투가 큼지막한데 다가 이마에는 일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눈꼬리가 찟어져 올라간 것으로 보아 결코 순박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사나이는 술 한잔을 쭈욱 들이켜고 술잔을 술상 위에 덜컥 내려놓으며,
「계집년 얘기는 말도 마소. 계집년들 때문에 내가 이에 신물이 날 지경이라오.」
그리고 나서 김삿갓의 얼굴을 잠시 멀거니 바라보더니 별안간 깜짝 놀라 보이며,
「아니 이거, 자네는 천마산(天摩山)에 사는 이서방 아닌가. 여보게, 이거 얼마만인가.」
하고 외치며 대뜸 손을 움켜잡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전연 모를 사람이었다. 그래서 빙그레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노형이 사람을 잘못 보셨소이다. 나는 이 서방이 아니고, 김서방이오.」
그러나 상대방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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