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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43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5. 26. 16:03

방랑시인 김삿갓 1-143 회

「선생을 만났기 때문에 별안간 그런 생각이 늦게 된 것은 아니에요. 나는 오래 전 부터 마음속으로는 적임자를 구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하늘이 나를 살려 주시느라고 선생이 훌륭하신 분이 나타나신 거예요. 이것은 하느님의 지시임이 분명하니, 아무 소리 마시고 훈장 자리를 꼭 받아 주세요. 그래야만 나도 살고 아 이들도 살게 되는 거예요.」

훈장의 말은 기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훈장 자리를 내놓아야만 자기도 살고 아이들도 산다는 것은 얼마나 현명한 판단인가.

김삿갓은 불현듯 돈이 한푼도 없는 자기 자신의 신세를 생각해 보았다. 멀지 않아 추위가 닥쳐 올 판인데, 훈장 자리를 타고 앉으면 겨울을 편하게 날 수 있으리라는 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훈장 노릇을 해먹으려고 집을 나온 것은 아니다. 

「선생이 훈장 자리를 내놓으면 생계(生計)가 곤란하실 게 아니오.」
「그 점은 조금도 걱정 마시오. 나는 백중국이라는 약국 간판 만 있으면 먹고 살아가는 데는 아무 걱정이 없어요. 만약 선생이 훈장 자리를 맡아 주신다면, 나는 선생한테 《동의보감》을 배워 가지고, 나 자신도 진짜 명의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피차간 이 얼마나 좋은 일이오.」

이진수는 워낙 머리가 비상한 위인인지라, 자기가 살아갈 방도는 용의 주도하게 꾸며 놓고 있었다. 김삿갓이 대답을 주지하고 있는데, 마침 젊은 환자가 한 사람 또 찾아왔다.

환자는 17,8세 가량 되어 보이는 새서방이었다. 환자가 방안에 들어와 큰 절을 올리자, 무봉은 절을 받는 둥 마는 등 매우 거친 어조로


「자네는 무슨 일로 왔는가?」

하고 묻는데, 퉁명스럽기 짝없는 그 어조에 이상하게도 권위가 풍겨 보였다.
환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저는 별다른 병은 없사옵니다. 다만 이상하게도 입에서 몸쓸 냄새가 풍겨 나오기 때문에 선생을 찾아왔사옵니다.」

무봉 선생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입에서 냄새가 좀 풍겨 나기로 어떤가. 잠자리에서 색시하고 입을 맞추기가 거북해 그러는 모양이지?」

환자는 얼굴을 붉히며,

「선생님두 참!」

무봉 선생은 즉석에서 치료 방문을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입에서 냄새가 나거든 마늘을 많이 먹게. 마늘은 정력제로도 좋은 것이야. 그런 일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약국을 찾아오는가. 」

김삿갓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웃음을 씹어 삼켰다. 마늘은 강장 제일 뿐이지, 정력제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환자가 고개를 갸울이며 반문한다.

「선생님! 마늘을 먹으면 입에서 마늘 냄새가 지독하게 난 것이 아니옵니까.」

그러자 무봉은 천연스럽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야 물론이지. 마늘 냄새가 지독할 것은 연한 일이지. 그러나 마늘 냄새는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냄새가 아닌가. 마늘을 많이 먹고, 하룻밤에 한 번 해줄 것을 두 번 세 번 해준다면, 새댁은 냄새가 좀 나더라도 그 편을 훨씬 더 좋아할 것이 아닌가. 그런 일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약국을 찾아오느냐 말일세. 어서 돌아가 마늘이나 많이 먹게!」
환자가 백배 사례 하고 돌아가 버리자, 김삿갓은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선생은 과연 천하의 명의십니다.」

돌팔이 의사는 껄껄껄 웃으며 태연 자약하게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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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44 회

「명의라는 것이 따로 있는 줄 아시오? 자고로 명의란 약을 잘 써서 명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임기응변으로 말을 잘 둘러대야 명의가 되는 것이라오.」
「병을 그런 식으로 치료해 주다가는 사람을 잡기 쉬울 터인데. 그런 일은 없으셨던가요?」
「선생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의사치고 환자를 죽여 보지 않은 의사가 어디 있겠소. 명의라는 말은 <환자를 많이 죽여 본 의사>라는 말인 줄을 모르시나요?」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선생은 약을 잘못 써서 환자를 죽여 본 경험이 많다는 말씀입니까.」
「많지는 않지만 없지도 않아요. 그러나 사람은 언젠가는 어차피 죽을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어린 아기를 죽였을 때만은 거북한 생각이 노상 없지는 않았지만-----」
「옛 어린 아기를 죽이 본 경험도 있으신가요?」

아무리 돌팔이 의사이기로 어린 애기를 죽여 온 일이 있노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데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른들의 경우는 오만 가지 병이 많아서 약을 잘못 쓰면 죽일 수도 있겠지만, 어린 애기들의 병이란 감기나 소화 불량 정도인데 어쩌다가 어린 애기까지 죽여 본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김삿갓이 정면으로 나무라 주자. 돌팔이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지금 같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그때만 해도 약국은 처음으로 시작했을 때의 일인지라, 경험이 너무 부족해 그랬던 것이지요」
「생때 같은 애기를 죽었다면 부모의 행패가 대단했을 터인데, 그런 것을 어떻게 막아 내셨습니까.」
「그것도 역시 배짱으로 무사히 넘겨 버렸지요. 그때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시려오?」

그리고 돌팔이 의사는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봉이 백중국이라는 약국 간판을 내건 지 열흘쯤 지난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다. 산골 사람 하나가 불덩어리같이 열이 높은 어린 애기를 업고 와서,

「선생님! 이애가 무슨 병인지 몸이 불덩어리같이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열을 좀 내리게 해주십시오.」

하고 원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돌팔이 의사는 패독산을 한 첩 지어 주었는데, 패독산만 가지고는 미흡한 것 같아서 부자(附子)를 몇 톨 곁들여 넣어 주었다. 부자가 극약(劇藥)인 줄은 모르고, 다만 열제(熱劑)인 줄 만 알았기 때문에, 자기 딴에는 이열치열 (以熱治熱)하는 화제 (和劑) 를 지어 준답시고 약방문에도 없는 부자를 첨가해 주었던 것이다.

어린 애기는 집에 돌아가 그 약을 달여 먹고 그 자리에서 즉사 하였다. 그러니까 애비 되는 사람이 백중국으로 달려와 애기를 살려내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돌팔이 의사는 속으로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나 머리를 수그려 사과를 했다가는 뒷수습이 어려울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린가. 그 약을 먹고 열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네. 자네 말을 믿을 수가 없으니, 나와 함께 직접 집에 가보세.」

무봉 선생은 환자의 집으로 달려와 얘기의 시체를 만져 보다가, 태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호통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자네는 멀쩡한 거짓말을 했네그려. 애기는 몸이 싸늘할 정도로 열이 깨끗하게 내렸는데, 뭐가 불만스러워서 야단이란 말인가.」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포복 절도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