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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48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6. 22. 16:30

방랑시인 김삿갓 2-48 회

「과부가 도망을 갔다면 놀이를 따라간 것이 분명한데, 그게 무슨 불상사겠소.」
그러면 처녀가 애기를 낳았다는 말씀인가요?」
「에이, 여보시오. 그런 농담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이런 불상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향약계의 차수로서 나의 권위가 설는지, 삿갓 선생의 지혜를 받고 싶어 아까부터 선생을 눈알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은 거예요.」
「무봉 신생은 아까부터 <불상사>라는 말만 연발하고 계시는데 대관절 그 불상사란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건의 내용을 알아야만 조언을 해드릴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무봉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손으로 머리를 두드리면서,

「아차! 내가 아직 불상사의 내용을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까마귀 알을 먹었나, 이즈음에는 정신이 왜 이렇게도 없지. 실상인즉, 어젯밤 백락촌 마을에 도난 사건이 있었어요. 우리 마을은 <지상 낙원>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도난 사건 같은 것은 한 건도 없었는데 어젯밤에 도난 사건이 처음으로 발생했으니, 이런 불상사가 어디 있겠느냐 말이오.」
「백락촌에 도난 사건이 있었다구요? 도대체 누가 뉘 집 물건을 훔쳐 갔다는 겁니까?」
「물건을 훔쳐간 것이 아니라, 밤사이에 누가 포천(抱川) 노파네 파밭에서 파를 몽땅 캐어 갔다는 거예요.」
「포천 노파는 아들이 일찍 죽어서 손자 3명을 데리고 파 농사를 지어 근근히 살아오고 있었는데, 어젯밤에 누군가가 백 평 가까운 파밭에서 파를 몽땅 캐어 갔다는 것이었다.

「포천 노파가 조금 아까 나를 찾아와서 딱한 사정을 울면서 호소하니,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느냐 말이오?」
외로운 할머니가 오랜 세월을 두고 정성껏 가꾸어 온 파를 밤사이에 몽땅 캐어 갔다면, 그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파밭에서 파를 송두리째 캐어 갔다는 걸 보면, 요새 파 시세가 무척 좋은 모양이죠?」

무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오늘 처음으로 들은 이야긴데, 금년은 파 농사가 흉작이기 때문에, 파는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래요.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이러나저러나 이런 불상사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사후 처리를 잘해 줘야만 차수로서의 나의 권위가 뚜렷해질 게 아니겠소. 그래서 이번 일만은 사후 처리를 멋들어지게 해주고 싶은데, 어찌 했으면 좋을지 삿갓 선생이 좋은 지혜를 좀 빌려 주시오.」

무봉은 도난 사건 자체를 중대시하기보다는, 이번 사건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뚜렷하게 세워 보이고 싶은 공명심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사후 처리란 별 게 있겠읍니까. 살림살이가 궁색한 할머니가 그런 일을 당했다니까,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가가호호 돌아가며 돈을 얼마씩 추렴을 해주면 좋을 것 같군요.」 

김삿갓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백락촌에는 향약계가 있는 것이 머리에 떠올라 이렇게 말했다.

「참, 이 마을에는 향약계가 있지 않습니까. 향약계의 강목 중에서는 <환난 상휼>이라는 강목도 들어 있는 줄로 알고 있읍니다. 환난 상휼이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서로 도와 줘야 한다 는 뜻이니까, 그 취지에 따라서 도난당한 손해를 향약계에서 변상을 해주면 될 게 아닙니까.」

무봉은 그 말을 듣고 감탄의 무릎을 친다.

「참, 그렇군요. 나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었는데, 선생이 참으로 좋은 말씀을 해주셨소이다. 그러면 포천 노파의 도난 손실에 대한 변상은 향약금 중에서 내주도록 하겠소이다. 설마 마을 사람들이 반대는 안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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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49 회

「향약계라는 것은 그런 때를 위해 생겨난 것인데, 그것을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설사 반대하는 사람이 한두 명쯤 있다손 치더라도 옳다고 생각되는 일은 대담하게 실천해 나가셔야만 차수 어른의 권위가 확립될 것이 아닙니까.」

무봉은 <차수 어른의 권위가 확립된다>는 말이 무척 마음에 드는지 크게 기뻐하면서,

「사후 처리를 그렇게 해준다면 모두들 나를 우러러보게 되겠지요?」

그리고 잠시 뜸을 두었다가,

「누가 파를 훔쳐 갔는지 범인을 내 손으로 잡아내기만 하면 그이상 좋은 일은 없을 터인데.........」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범인을 잡아내자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닌 겁니다.」

김삿갓이 무심히 그렇게 말하자, 무봉의 눈이 별안간 휘번덕거린다.

무봉은,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트이는지 김삿갓의 손을 덥석 움켜잡는다.

「삿갓 선생! 범인을 우리 손으로 잡아낼 수 있다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김삿갓은 내가 너무도 입빠른 소리를 했구나 싶어 약간 뉘우치는 기색을 보였다.

「물론 법인을 꼭 잡아낼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머리를 잘만 쓰면 범인을 알아내기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 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범인을 정면으로 밝혀내는 데는 별로 찬성을 못하겠읍니다.」
그 소리에 무봉은 펄쩍 뛸 듯이 놀라 보인다.

「범인을 잡아내는 데 찬성을 못 하겠다니, 삿갓 선생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잡을 수 있는 범인을 붙잡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은 도둑을 권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씀이오!」 

김삿갓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속담에 <호랑이도 쏘아 놓고 보면 불쌍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을 잡고 나면 일시적으로는 기분이 명쾌할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마을 사람 하나를 영원히 매장해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놈은 매장을 시켜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무봉선생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젯밤에 파를 흠쳐간 범인은 반드시 우리 마을 사람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도둑을 정면으로 밝혀 낼 생각은 단념하시고, 그 사람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도록 간접적으로 선도해 나가는 것이 지도자로서는 가장 현명하신 방법일 겁니다.」
「도둑놈은 반드시 우리 마을 사람일 것이라고, 삿갓 선생은 어 근거를 두고 그런 단정을 하시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파밭에서 파를 몽땅 캐어 가려면 시간이 꽤 많이 걸렸을 테니까, 만약 낯선 사람이 와서 그런 짓을 했다면 집집마다 개가 굉장히 짖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젯밤에는 어느 집에서도 개가 짖지 않았다고 하니, 그렇다면 범인은 마을 개들이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법인은 마을 사람이 분명하다 는 것을 단정할 수 있을 겁니다.」

무봉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군요. 그렇다면 더구나 범인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 아니오.」
「제 생각은 무봉 선생과 정반대입니다. 한 번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범인을 직접 밝혀 내기를 포기하고 그 사람을 간접적으로 선도해 나가도록 하셔야 합니다.」

도난 사건의 사후 처리에 대해, 무봉과 김삿갓의 의견은 정면으로 대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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