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66 회
봉녀는 크게 당황하는 빛을 보이며,
「정말예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는 그 말을 믿고 그렇게 말했을 뿐이에요.」
「그 약을 언제부터 쓴다고 하던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사흘 전부터 쓰고 있대요. 그 약을 닷새 동안만 먹으면 끝장이 난다니까, 이제는 이틀밖에 남지 않은 셈이에요.」
김삿갓은 그 대답 한마디로 무봉의 잔학무도한 음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무봉은 지금 김 향수를 독살하려고 사흘 전 부터 그에게 독약을 먹여 오고 있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무봉의 엄청난 음모를 속속들이 알고 나자, 봉녀를 그 이상 붙잡아 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봉녀의 손을 의식적으로 정답게 어루만져 주며 이렇게 말했다.
「김 향수가 2,3일 안으로 죽고 나면, 우리들은 그때부터는 맘 대로 만날 수 있게 되겠지?」
「그 양반만 돌아가시면 저희들의 문제는 맘대로 될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 그러면 그때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늦기 전에 어서 가 보아요!」
「그럼, 가겠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곧 알려드리겠읍니다.」 봉녀는 커다란 희망을 품고,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후유」
김삿갓은 잠자리에 털썩 누워 버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봉은 지금 김 향수를 독살하고 있는 중인데, 그를 살려 낼 무슨 방도가 없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병이 이미 골수에 들어 송장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린 김 향수를 억지로 살려 내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 같았다.
그보다도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의 문제였다.
(가만있자, 김향수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물어보나 마나 무봉은 김 향수를 죽이고 나면, 봉녀를 김삿갓과 강압적으로 결혼시키려고 덤빌 것은 뻔한 일이다. 누이동생을 한 밤중에 김삿갓의 이불 속으로 들여보낸 것도 그에 대한 전주곡이 었음이 분명하였다.
만약 무봉의 마수에 걸려들어, 싫든 좋든 간에 봉녀와 깊은 관계가 맺어지는 날이면, 삿갓 자신은 훈장 신세를 영원히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칠 노릇이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엇을 주저하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당장 이 시간에 도망을 쳐버려야 한다.)
김삿갓은 별안간 용수철 퉁긴 듯이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옷을 추려 입기가 무섭게 삿갓을 깊숙이 눌러 쓰며 밖으로 달려나왔다.
무봉의 무시무시한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삼십육계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반년 가까이 훈장 노릇을 해오며 아직 보수다운 보수를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지만, 보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가자,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길을 가야 한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훈장 노릇을 해온 것은 순전히 외도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오직 방랑의 길이 있을 뿐이다!)
김삿갓은 <새벽의 탈출>을 감행하며 맘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이른 봄의 새벽 공기가 살을 에는 듯 차갑다. 그러나 김삿갓은 누군가 추격을 해올 것만 같아 숨 가쁘게 걸음을 옮겨 나갔다. 얼마를 가다 보니, 동쪽 하늘이 환히 밝아 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제야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의 세계를 되찾은 것만 같아, 가슴을 활짝 펴며 기운차게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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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67 회
화적 떼기둥서방
오래간만에 죽장 망혜로 대자연 속을 휘적휘적 걸어 나가노라니 김삿갓은 기분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시야를 기로막는 첩첩 태산 들은 아직도 아침 안개 속에 잠겨 있는데, 저 멀리 산골짜기에 흘러가는 물소리가 쌍수를 들어 김삿갓을 반갑게 맞아 주는 것만 같았다.
(내가 미쳤지, 무엇 때문에 무봉 같은 협잡꾼에게 붙잡혀 반년 동안이나 허송 세월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이제 와서는 백락촌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아득한 꿈나라의 일인 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니 멀고 가까운 산에서 영절하게 울어 쌓는 새소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마치 하나의 교향악처럼 아름답게 들려온다.
(이렇게도 좋은 산수를 내버려두고 내가 왜 어리석게도 속세의 계루에 얽매여 돌아가고 있었더란 말인가.)
김삿갓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불현듯 이태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가 머리에 떠올랐다.
나에게 묻기를 왜 산속에 사느냐
웃고 대답치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흐르는 물위에 복사꽃 아득히 떠가니
여기가 바로 별천지인가 하노라.
問余何事栖碧山 (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 (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산속에 사는 이태백의 멋들어진 풍류를 속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싶었다. 이태백에게는 <산중문답>과 취향을 같이하는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친구와 술을 나누는데 산에는 꽃이 피네
한 잔 한잔 또한 잔 술잔을 거듭한다
술이 취해 잠이 오니 그대여 돌아가라
내일 또 오려거든 거문고 안고 오게.
兩人對酌山花開 (양인대작산화객)
一盃一盃複一盃 (일배이래부일배)
我醉欲眠君且去 (아취욕민군차거)
明朝有意抱琴來 (명조유의포금래)
신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희로애락을 초월하여 산천초목과 호흡을 같이하며 살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신선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태백을 시성이니 시선이니 하고 불려 오지 않던가.
김삿갓은 자기 자신을 <시선>으로 자처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작(詩作)에 있어서는 이태백을 따르지 못할망정, 자연을 사랑하고 산수를 즐기는 점에 있어서는 이태백보다 조금도 뒤질 것이 없다고 자부하며 산길을 휘적휘적 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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