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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정리해 본 성씨와 본관 및 족보에 대한 일반 상식

이종육[소 운(素 雲)] 2023. 1. 17. 17:06

제가 정리해 본 성씨와 본관 및 족보에 대한 일반 상식을 공유하고자 올려봅니다.

Ⅰ. 성과 씨의 개념

우리는 보통 성과 씨를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성은 르완다어 shengura(to overwhelm)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압도하는 여성” 즉 “모계사회 여성 족장”을 의미한다.​

​씨는 르완다어 uka(to spray, sprinkle, squirt)의 과거형 utse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남성이 씨를 뿌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은 원래 “출생의 계통” 즉 모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문자학의 고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성인지소생야(姓人之所生也)”라 하여 성은 모계를 중심으로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씨는 “동일 혈통” 즉 부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제후국의 군주가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씨를, 여자는 성을 호칭하였다가 성씨로 합일 되었으며 씨는 귀천을 분별하였기 때문에 귀한 자는 씨는 있으나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Ⅱ. 한국 성씨의 유래

성씨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자신의 성씨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다. 그렇다면 한국의 성씨에 대한 기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황금알에서 나왔다고 “김씨(金氏)”라 하여 김해 김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으로 우리나라는 부족국가에서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문헌상으로 성씨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 건국 초기인 1세기경부터이다.

  1. 삼국 시대

한국인의 성씨 기원은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의 사서에 의하면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은 국가의 초기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국호를 고구려라 했기 때문에 성을 고씨(高氏)라 하였다. 충신들에게는 극(克), 중실(仲室), 소실(小室) 등의 성씨를 내렸다.

장수왕 시대(413~490)부터는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을지(乙支) 등이 사용되었다.

“신라”는 진흥왕 시대(540~576)부터 성씨를 쓴 것으로 추정한다.

박(朴), 석(昔), 김(金) 3성의 전설이 전해오며 3세 유리왕 9년(32년)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배(裵), 설(薛)의 성을 사성(賜姓)하였다.

“백제”는 시조 온조(溫祖)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씨를 부여(夫餘)씨라고 하였다.

근초고왕 시대(346~375)부터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의 8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2. 고려 시대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 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해 전국의 군, 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씨를 하사 하셨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씨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문종(文宗 1055) 9년에 성씨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법령을 내림으로써 일반 민중들이 성씨를 쓰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때까지는 성씨를 쓰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게 되었다.

  3. 조선 시대

조선 초기에 성씨는 양민에게까지도 보편화되었다. 하지만 노비와 천민 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씨를 쓸 수가 없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의 40% 정도를 차지하였다.

그러니 성씨가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신분 해방으로 천민들 중 일부가 족보를 만들고 성씨를 가지게 된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양반과 상민의 신분 계급이 타파되자 성씨의 일반화가 촉진되고 너나없이 양반임을 주장하고 매관매직은 물론 족보까지 사고파는 행위도 성행하게 된다.

그리고 1909년 새로운 호적법이 시행되고 누구라도 성씨와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어

성씨가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담당 동(洞)서기나 경찰이 성씨를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씨와 본관을 따르거나 명문 집안의 성씨와 본관을 모방했다.

Ⅲ. 본관의 개념과 유래

  1. 본관의 개념

본관이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시조의 고향을 의미한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고향이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즉 원산지”라고 기술되어있다.

또 인터넷에 조회해 보면 본관은 “개인의 시조가 태난 곳 또는 어느 한 시대에 정착했던 조상들의 거주지”라고 되어있다.

본관이란 시조가 태어났거나 성장하는 지역으로서 성씨의 고향을 말한다.

일명 “본, 본적, 관향, 관적”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본관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이름 앞에 붙인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은 각기 혈연과 지연으로 얽혀있다.

성은 부계의 혈통을 나타내면서 시간상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보여 준다면 본관은 어느 한 시대에 정착했던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내므로 공간상의 의미가 크다.

  2. 본관의 유래

본래 성씨와 본관 제도는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써 대두되었기 때문에 왕실. 귀족. 일반지배계급. 양민. 천민 순으로 수용되었다.

우리나라의 성씨와 본관 제도는 중국의 것을 수용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신라 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초기로 생각된다.

  3. 시조와 본관의 상호관련성

원칙적으로 시조가 태어난 곳과 본관은 서로 일치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가. 시조가 같으면서 본관이 다른 경우

한국의 씨족사를 살펴보면 세상에는 시조가 같으면서 본관은 물론 성마저 서로 다른 사례도 있다.

예를 들면 “김해김씨, 김해허씨, 인천이씨”의 시조는 다 같이 “김수로왕과 허황옥왕비 부부”이다.

하지만 본관은 김해와 인천으로 서로 나누어져 있고 성은 김씨, 허씨, 이씨로 서로 다르게 나누어져 있다.

더구나 인천이씨는 고려 공민왕 때 수차례 홍건적을 격퇴하여 훈공을 세운 함안이씨의 이방실 장군을 자신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인천이씨는 함안이씨가 자신의 시조와 같은 혈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함안이씨는 인천이씨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세계의 씨족사를 살펴보면 시조가 같으면서 종교가 서로 다른 사례도 있다.

기독교, 회교, 유대교인들의 시조는 아담으로부터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이다.

그럼에도 종교는 각각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나누어져 공존하고 있다.

    나. 본관이 같으면서 시조가 다른 경우

본관이 “성산”으로 같으면서 시조가 서로 다른 사례는 우리 가문을 포함하여 성주 육리라는 6가문이 있었다.

그중 4 가문은 본관을 다르게 변경했다. 하지만 우리 가문과 “휘 능일”을 시조로 하는 두 가문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다. 시조가 다르면서 본관이 같은 경우

시조가 다르면서 본관이 같은 사례는 인동장씨, 전주최씨, 하동정씨 등이다.

Ⅳ. 족보의 개념과 유래

  1. 족보의 개념

족보는 뼈대 있는 가문의 큰 자랑이다. 족보란 한 종족의 계통을 부계(父系) 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이다.

그것은 동일혈족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며 동족끼리 유대를 돈독히 하고 가통의 계승을 명예로 삼아 효(孝)의 근본을 이루기 위한 한 가문의 역사책이다.

  2. 족보의 유래

    가. 중국(中國)

족보는 어느 나라나 처음에는 왕가의 계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은 일찍이 육조시대(六朝時代)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왕대실록” 이니 “원록(源錄)”이니 하여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바로 족보이다.

씨족의 족보가 발달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에 대하여는 명백하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 한(漢)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관직 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설치하여 응시생의 내력과 그 선대(先代)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가 된다.

     나. 고려시대(高麗時代)

권문귀족(權門貴族)에 있어서는 이른바 족보의 체제를 구비한 세계(世系), 항렬(行列)의 방식을 취한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계도(系圖)에 의하면 같은 항렬에 있는 여러 인물이 같은 자근(字根)으로 되어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당시 이미 계보에 관한 관념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종(文宗, 1047년) 때에는 성씨·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부책(簿冊)을 관에 비치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신분 관계를 밝혔다.

그 당시는 족보의 유행이 한창이던 송(宋)과의 교류도 빈번하였던 시대여서 족보의 유행은 하나의 필연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당시에는 출판 사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筆寫)에 의해 족보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다. 조선시대(朝鮮時代)

국초(國初)부터 족보의 편성과 간행의 필요가 더욱 절실하여 급속히 진전되었다.

왕실 자신이 족벌정치의 국가형태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儒敎)를 국시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성족(姓族) 파별로 가승(家乘)을 명백히 할 필요가 생겼다.

족보가 없는 집안은 행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족보가 성행하였다.

족보의 체제도 현재의 형태와 같이 완성되었다. 당시는 원시적 부족사회의 형태와 같은 동족의 집단부락이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붕당학파(朋黨學派)의 싸움이 치열하여 배타적 관념으로 인해 자연히 동당(同黨)· 동파(同派)· 동족(同族)의 일치단결을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라. 한국 최초의 족보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嚆矢)는 고려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의종(毅宗) 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씨족의 족보는 조선 명종 때(1562년) 간행된 문화유씨보(文化柳氏譜)가 최초의 족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일명 가정보(嘉靖譜)라고도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여 내려온 족보 가운데 문헌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체계적으로 족보의 형태를 갖춘 신뢰할 만한 것은

조선 성종 때(1476년) 간행된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중간본만 전해진다. 성화보(成譜)는 가정보(嘉靖譜)보다 약 86년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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