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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② 홍예문 (虹霓門)

이종육[소 운(素 雲)] 2023. 4. 3. 18:23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② 홍예문 (虹霓門)

응봉산(자유공원)남쪽 중구 송학동2가20번지의 산줄기를 뚫어 만든 문이 홍예문이다.자유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 웃터골 오포산 기슭을 넘어가려면 이 홍예문을 지나야 한다. 홍예문의 입구 양쪽 돌벽을 고색창연하게 뒤 덮고 있는 담쟁이덩굴은 오랜 세월동안 인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홍예문(무지개문)은 강제개항 이후 일본이 각국 조계와 축현역,만석동 일대를 잇기 위해 화강암을 높이 쌓아 통로를 무지개처럼 둥글게 만든 뒤 붙인 이름이다. 홍예문은 한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불렸다.홍여문(무지개 돌문), 또는 수레문 등이 그 것이다.하지만 모두‘무지개처럼 된 돌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홍예문은 모양새나 쓰임새 면에서 아름답고 실용적이지만 만든 배경엔 일제 침략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다. 홍예문은1905년에 착공해1908년 준공되었다.

화강암을 쪼아서10여m높이로 쌓았는데 문 위에 오르면 인천 앞바다와 항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인천이 개항되자 일본과 청국을 비롯한 구미 각국은(현)중앙동을 비롯해 자유공원 남쪽 일대에 조계를 설정했다. 일본은 자기네 세력을 신생동, 신포동에 이어 전동, 만석동 일대로까지 뻗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계에서 전동(동인천)과 만석동을 향하는 도로를 마련하는데 고심했다.일본조계나 항구에서 만석동을 갈 때 내동과 용동마루턱을 거쳐 화평동을 우회하는 게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해안선 지역을 거쳐 만석동으로 통행하기엔 매우 불편한데다 해안선 도로를 신설하기에는 공사가 너무 컸다.일제는 고심 끝에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홍예문을 만들었다.


홍예문의 설계·감독은 일본이 맡았고 유명한 중국의 석수장이들이 공사에 참여했으며 흙일(土役)과 잡일은 기술 없고 돈 없던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맡았다고 한다.홍예문 공사에 참여했던 중국인들은 멀리 산둥(山東)반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 건너 온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꾸리’라고 불린 이들은 홍예문 공사는 물론 개항 후 인천에서 벌어진 서구식 양관공사, 인천항 축조공사 등 큰 공사에 한국 노무자들과 함께 참여했다.

당시 흙을 파내면서 주위가 낭떠러지로 변해 파낸 흙을 실어 나르던 인부50여 명이 흙더미와 함께 떨어져 목숨을 잃는 대형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홍예문은 산에 구멍을 낸 것이라 해 혈문(穴門)이라고도 불렀다.

3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만든 홍예문은 인천인들에게도 편리함을 주었다. 홍예문은 내동 내리교회 쪽에서‘약대이집’고개를 넘어 청관 어귀까지 높은 길을 이어주는 산길의 육교로 지금까지 이용되고 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월남해 송월동에서 살고 있는 김동일(85)씨는“홍예문을 통과하는 바람이 시원해 무더운 여름철이면 이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옷을 벗고 땀을 식히기도 했을 정도”라며“홍예문은60년대까지만 해도 데이트 장소로 유명해 연인들이 곧잘 찾았다.”고 회상했다.

40여년 전만해도 홍예문의 난간은 쇠무늬(鐵紋)로 곱게 꾸며 안전사고 방지기능은 물론 전망대로서도 훌륭한 장소였다.

홍예문에 얽힌 사연들도 많다. 인천석금(저자 고일)에 따르면 해방 후 송건영이라는 청년이 영화에서 본대로 시험을 해보려고 우산을 쓴 채 이곳에서 뛰어내렸다.송 씨는 다행히 아무 상처 없이 무사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중학교1학년이었던 필자는 학교(남중)기계체조 부원10여명과 자유공원을 자주 찾았다.

1965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개최한6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중학교1학년이던 필자는 단체(6명)종목에서2등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인천이 경기도에 편입돼 도 대표만 되어도 상당한 평가를 받던 시절, 처음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당당하게 수상한 것이어서 체육회 관계자들 까지도 놀라게 만든 기억이 생생하다.

이어7~8회 대회 등3회 연속 은메달을 목에 걸었으나 끝내 금메달은 손에 쥐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일반인들이 기계체조를 잘 모르던 시절 우리 팀은 맥아더장군 동상 앞 광장에서 덤부링(마루운동)등 곡예를 펼쳐 공원에 올라온 시민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특히 유병덕(74)선배는 홍예문 위 난간을 잡고 물구나무서기를 자주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간을 콩알처럼 만들며 유명세를 탔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장면이었다.

홍예문을 중심으로 중앙동, 관동, 신포동 등 남쪽에 사는 청년들과 북쪽의 전동,축현동 청년들이 자유공원을 점령하기 위한 패싸움이 자주 일어났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쇠몽둥이는 물론 막대기 하나 없이 오로지 주먹에만 의한 싸움으로 큰 부상자들이 없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인천 시민들은 홍예문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지나던 길을 학창시절 친구들과 그리고 애인과의 데이트,결혼 후 부부가 돼 다시 아이들의 손을 잡았던….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옛 추억을 홍예문 역시 말없이 간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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