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63 회
「그렇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하옵니까.」
「물론이지. 무슨 일인지 모르나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조금도 숨기지 말고 모든 것을 될수록 자세하게 말해 다오. 그러면 그 이야기 속에서 편지 사연을 이해할 수 있는 무슨 건덕지가 반드시 나올 것이다.」
김삿갓은 소년에게 용기를 주려고 자신만만하게 말해 주었다. 한 자뿐인 편지라도 지내 온 경과를 알고 나면 해답이 절로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의 뚜껑을 이렇게 열어 나간다.
「이것은 선생님께만 여쭙는 말씀입니다마는, 저에게 이 편지를 보내 온 사람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이옵니다.」
김삿갓은 <여자>라는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편지를 보내 온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그러면 그 여자가 어떤 여자냐?」
편지의 주인공이 여자라는 말에, 김삿갓은 놀라움과 동시에 호기심이 솟구쳐 올랐다. 소년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선생님이 물으시니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읍니다.」
그리고 소년은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소년─즉, 조득남은 산 너머 마을에 사는 현 진사(玄進士) 댁 고명딸인 보옥(寶玉)이라는 처녀를 오래 전부터 혼자 사모해 오고 있었다.
보옥이라는 처녀는 나이가 조득남보다 두 살 맏이인 열 여섯 살로서,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학식도 대단하여, 《논어(論語》 와 《맹자(孟子)》까지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야 어쨌거나, 조 소년은 그 처녀를 먼 빛으로 한 번 바라본 그날부터 그 처녀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자나깨나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오직 그 처녀의 자태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몇 달 전부터는 현 진사댁 계집종을 매수하여 그 처녀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물론 처녀한테서는 답장이 없었다.
그러나 조 소년은 답장이야 있거나 말거나 닷새에 한 번씩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다. 그 모양으로 열 번이나 편지를 보냈더니, 현 처녀도 조 소년의 정성에 감동이 되었던지 이번에 처음으로 답장을 보내 왔는데, 그 답장이 바로 <籍>이라는 글자 한 자뿐이라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자초지종을 다 들어보고,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다.
「하하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더니, 너의 끈덕진 공세에 그 처녀가 기어코 함락이 되어 버린 모양이구나.」
그러자 소년의 얼굴에는 별안간 분노의 빛이 넘친다.
「저로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웃지는 말아 주십시오.」
김삿갓은 얼른 웃음을 거두어 버렸다.
「내가 웃은 것은 잘못한 일이었다. 그 점은 용서하여라.」
「용서가 문제가 아니옵고 이 편지의 사연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꼭 알고 싶사옵니다.」
「너는 편지를 열 번씩이나 보내서 이 답장을 받았다고 했는데, 네가 보낸 편지 사연은 어떤 것들이었느냐?」
「다른 사연은 안 쓰고, 우선 만나 놓고 봐야 하겠기에 저는 꼭 한 번 만나 달라는 말만 반복해 썼을 뿐이옵니다.」
「꼭 한 번 만나 달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라고?......너는 번번이 만나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만나 보고 싶어 미치겠는 걸 어떡합니까. 」
「이성을 사모하게 되면 누구나 이와 같이 되는 법이니라.」
김삿갓은 그렇게 말하다가, 불현듯 영감 같은 것이 머리에 떠 올랐다.
그리하여 <籍>자를 새삼스러이 요모조모로 뜯어 보다가, 별안간 무릎을 탁 치며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앗! 이제야 알았다. 이 편지 사연이 네게는 기가 막히게 좋은 편지 사연임이 분명하다.」
「엣? 편지의 사연을 알아내셨다구요? 어떻게 좋은 사연이라는 말씀입니까」
김삿갓은 기쁨이 넘친 어조로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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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64 회
「이 편지의 사연을 알아내느라고 나는 진땀을 흘렸다. 이 편지의 사연은 내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자 조 소년은 김삿갓의 손을 와락 움켜잡으며,
「선생님! 편지 사연이 어떤 것이옵니까. 속이 타올라 못 견디겠읍니다. 속히 말씀해 주시옵소서.」
「네가 아무리 속이 타더라도 사연을 말하기 전에 너한테 꼭 하나 물어 봐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뭡니까. 뭐든지 물어 보십시오.」
「이 부근에 혹시 대나무밭이 어디 없느냐?.」
「난데없이 대나무 밭 얘기는 왜 물어 보시옵니까.」
「잔소리 말고 어서 대답이나 하거라.」
「글쎄올시다. 이 부근에 대나무밭은 없는 것 같은데...............」
조소년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을 해보다가, 별안간 얼굴을 번쩍 들며 큰소리로 외친다.
「앗, 있읍니다, 있읍니다. 현 진사댁 뒷동산에 제법 무성한 대나무숲이 있사옵니다. 도대체 선생님은 그걸 어떻게 알고 물어 보시웁니까.」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또 한번 무릎을 쳤다.
「그러면 그렇지!.... 이로써 이 편지의 사연은 완전히 알아내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스무하룻날 너를 대나무밭에서 만나자 는 사연임이 분명하다.」
조 소년은 날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다시 묻는다.
「<籍>자 한 자를 가지고 어떻게 그런 해석을 하시옵니까.」
「너는 꼭 한 번 만나 달라는 편지를 열 통이나 보냈으렸다. 거기에 대한 답장이 <籍>자가 아니냐. <籍>자를 여러 글자로 분해를 해보아라. 그러면 <竹來++一日>이라는 다섯 글자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스무하룻날 대나무밭으로 오라>는 뜻임이 분명하지 않느냐.」
소년은 너무도 기뻐 김삿갓에게 큰절까지 하며 말한다.
「선생님, 이제야 알겠읍니다. 선생님이 아니시면 저는 그 처녀를 영원히 못 만날 뻔했사옵니다.」
「오늘이 스무날이니까, 스무하룻날은 바로 내일이로다. 내일은 제만사하고 대나무밭에 가서 그 처녀를 만나 보도록 하거라.」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에끼 이녀석! 내가 보은을 바라고 편지 풀이를 해준 줄 아느냐」
「그야 물론 선생님이 그럴 분이 아니신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저의 아버님께서 선생님의 은혜를 결코 모르신다고는 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랐다.
「아니 그럼, '너의 아버님은 이 편지 사건을 이미 알고 계시다는 말이냐. 」
「아닙니다. 아버님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밤 집에 돌아가 아버님께 모든 것을 사실대로 여쭤 버릴 생각입니다.」
김삿갓은 조 소년의 말에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네 말을 이해할 수가 없구나. 처녀 총각이 비밀리에 만나는 것을 어느 부모가 좋아하리라고, 그런 얘기를 아버님에게 자진해서 고백하겠다는 것이냐.」
조 소년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대답한다.
「아닙니다. 상대방은 진사댁인데 저의 아버님은 풍헌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혼 같은 것은 감히 엄두를 못 내시옵니다. 그러면서도 진사댁 따님을 며느리로 맞아 왔으면 하고, 내심으로는 무척 갈망하고 계시옵니다. 그러니까 제가 선생님 덕분으로 그 처녀와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아시면, 아버님이 선생님의 은혜를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실 것이옵니까.」
겉으로는 어리수룩해 보이는 조 소년이건만, 모든 일을 계획적으로 추진시켜 나가려는 데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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