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79 회
현 진사는 자기도 몰라 볼 편지를 어린 소년이 자력으로 해득했다는 데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심사 목고에 잠겨 있었다.
실상인즉 현 진사도 이 혼사에 대해 노상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조 풍헌이 정선 고을에서는 소문난 부자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외아들이라면 그 많은 재산을 혼자서 물려받게 될 것도 마음에 들었다. 딸이 잘 살게되면 현 진사 자신도 음으로 양으로 덕을 보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명문 대가의 후예가 양반을 팔아먹고 상민으로 전락했 다는 이야기를 도무지 믿기가 어려운데다가, 신랑도 장래성이 별로 없어 보여서 혼사를 거절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본인들이 부모들도 모르게 밀회를 해오고 있었다면 문제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가. 현 진사가 주저하고 있는 눈치를 보고, 김삿갓이 다시 박차를가한다.
「제 말이 미덥지 않으시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따님한테 직접 확인을 해보시지요.」
현 진사는 당황히 손을 내저으며 대답한다.
「아, 아닙니다. 삿갓 선생이 우리 집 딸아이가 보낸 편지를 작접 보시기까지 했다니, 이제 와서 본인에게 따져 본들 무슨 소용이겠소이까.」
「그 점은 물론 그렇습니다. 따님의 편지를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요. 따님은 머리도 비상하지만, 글씨도 명필이었읍니다.」
현 진사에게는 그것도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내 딸이 외방 총각과 밀회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런 망신이 어디 있으며, 그런 계집아이를 누가 데려가려고 할 것인가................)
현 진사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침내 일대 결심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힘있게 들며 말한다.
「삿갓 선생!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본인들끼리 그렇게까지 되었다면, 이것도 천생연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삿갓 선생은 두 아이들이 원만하게 결합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주셔야 하겠읍니다.」
김삿갓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제가 보기에도 그 편이 현명하실 것 같습니다. 말이야 바른대로 말이지, 처녀 총각이 서로 좋아한다면 부모인들 무슨 힘으로 막아 낼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런 것이 바로 천생연분이 아닌가 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집 아이가 혼전 (婚前)에 외방 총각과 밀회를 했다는 얘기만은 외부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부탁드리옵니다.」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제가 미쳤다고 그런 얘기를 함부로 씨부려 대겠읍니까.」
이리하여 김삿갓은 마침내 허혼 승낙(許婚承諾)을 얻어 내고야 말았다.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으니 현 진사로서는 축하의 술이 없을수 없었다.
김삿갓은 술대접까지 받아 가면서,
「그러면 일간 택일(擇日)하여 사주 단자(四柱單子)를 정식으로 보내도록 하겠읍니다. 사주단자는 그 댁 가신(家臣)인 훈장 선생이 가지고 올 것이니,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하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은 발을 빼고, 훈장 선생을 내세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날 저물녘에 개선장군과 같은 기분으로 돌아오니, 조풍헌 영감은 눈알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다가 다급스럽게 물어 본다.
「삿갓 선생!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읍니까.」
「허혼 승낙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읍니다. 이제는 훈장 선생을시켜 사주 단자만 보내면 됩니다.」
풍헌 영감은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며,
「삿갓 선생! 우리 가문에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의 은공은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하겠읍니다.」
「그 말씀은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 주시죠.」
김삿갓은 술이나 얻어먹으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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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80 회
김삿갓은 보수를 바라고 중신애비로 나섰던 것이 아님은 세삼스러이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다만 서로 사랑하는 청춘 남녀를 한쌍의 부부로 맺어 주고 싶어서 별별 수단을 다 써가며 애를 썼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 풍현 영감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김삿갓 에게 술을 대접해 가면서,
「현진사 댁 규수를 며느리로 맞아 올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삿갓 선생의 덕택입니다. 우리 집 아이의 혼례식이 끝날 때까지는 삿갓 선생은 아무데도 가지 마시고, 우리 집 대사를 끝까지 돌봐 주셔야 하겠읍니다. 선생의 은공을 결단코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고 중신애비에 대한 인사를 단단히 치를 눈치를 보였다.
「잘 알았읍니다.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행동하겠소이다.」
김삿갓은 듣기 좋은 말로 대답은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날만 새면 아무도 모르게 길을 떠나 버릴 결심이었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나려면, 한사코 붙잡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돈이라도 안겨 준다면, 그야말로 치사한 인간이 되어 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장래에는 돈이 떨어져 문전 걸식을 하는 한이 있어도, 협잡꾼과 같은 인상은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날 밤 김삿갓은 주인 영감과 함께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다가 새벽녁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러다가 새벽에 눈을 떠 보니, 창 밖에는 <우수수>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응? 비가 오면 어떡하지?)
창황히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우수수하는 것은 비가 오는 소리가 아니라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낙엽 지는 소리를 빗소리로 속았음을 깨닫자, 불현듯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추야(秋夜)>라는 시가 연상되었다.
우수수 나뭇잎 지는 소리에
성긴 비가 오는 줄로 잘못 알고
아이더러 나가 보라 이르니
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네.
蕭蕭落葉聲 (소소낙엽성)
錯誤為疎雨 (착오위소우)
呼童出門看 (호동출문간)
月掛溪南樹 (월쾌계남수)
김삿갓은 비가 아니었음을 천만다행하게 여기며, 옷을 추려 입기가 무섭게 또다시 죽장망혜로 정처없는 나그네 길에 올랐다. 돌이켜 보면 조 풍헌 영감에게는 너무도 신세가 많았다.
또한 사랑하는 청춘남녀를 어거지로나마 짝을 지어줄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보람차게 여겨졌다.
김삿갓은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며 혼자 생각해 본다.
(아무런 이해 소관(利害所關)도 없이 청춘남녀를 결합시켜 주려고 애써 온 것 그것이 바로 인정이 아니겠는가. 인간 사회에서 인정을 제외해 버리면 뭐가 남을 것인가.)
청춘 남녀를 어거지로나마 결혼시켜 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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