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77 회
그러고 보면 날마다 주지육림 (酒池肉林)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결코 좋은 팔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자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명언이 있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책에 <부귀자의 삼환(富貴者의 三患)>이라는 말이 나온다. 몸이 부귀한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병환(病患)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소리다.
몸이 부귀한 사람은 첫째, 외출할 때면 언제나 수레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다리가 약해지는 <초궐병 (招蹶病)>에 걸리기가 쉽고 둘째, 날마다 산해진미만 먹어 오기 때문에 위장이 녹아나는 <난장병(爛腸病)>에 걸리기가 쉽고 세째, 몸이 부귀한 사람의 주변에는 언제나 유두분면(油頭粉面)의 미녀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에, 성적으로 약해지는 벌성병(伐性病)에 걸리기가 쉽다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현진사를 찾아가느라고 고갯길을 걸어 올라가자니 숨이 가빠 와서 <부귀자의 삼환>이라는 말이 결코 거짓말이 아님을 몸으로 실감하였다.
그리하여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남의 집 처녀 총각에게 좋은 일 하려다가 내가 병에 걸릴 지경이로구나. 빨리 매듭을 지어 주고 하루 속히 나의 본연의 길로 돌아가야지.」
이윽고 현 진사의 집을 찾아가니 현 진사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김삿갓은 인사를 나누고 나자, 단도 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동안에 신랑 될 사람을 좀 알아보셨읍니까.」
「나도 알아보았읍니다마는, 풍헌 영감의 의향은 어떠하시더이까.」
자기 생각은 덮어두고 상대편의 의향부터 묻는다.
김삿갓이 대답한다.
「풍헌 영감님은 생각이 많으신 모양이었지만, 제가 가까스로 설득하여 확답을 받아 놓았읍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진사 어른의 승낙이 있을 뿐이옵니다.」
「글쎄올시다.」
현 진사의 태도가 애매하기 짝이 없다. 양반이 아닌 사람을 양반이라고 속인 것이 들통이 난 것이 아닌가 싶어 김삿갓은 은근히 불안하였다.
「풍헌 영감님 댁으로 말하면 돈도 많것다, 신랑도 똑똑하겠다. 사돈을 맺고 나면 경제적으로도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렷다. 뭐가 못마땅해 주저하시옵니까.」
「글쎄올시다.」
현 진사는 까놓고 말하기가 거북한지 우물쭈물하기만 한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이쪽에서 등이 달아 오를 밖에 없었다. 김삿갓은 잠시 침묵을 지켜 오다가 조용히 입을 열어 물어 본다.
「진사 어른께서는 이 혼사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그려. 그러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시웁니까.」
현 진사는 까놓고 말하기가 거북한 듯 한동안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문득 용기를 내어 말한다.
「모든 것을 솔직이 말씀드리겠소이다. 그 댁은 가문도 분명치 않거니와, 우리 집 딸아이는 이미 《사서삼경》까지 통독했는데, 조풍헌 영감님의 자제는 이제 겨우 《사략》을 읽을 정도로 어리더군요. ......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 돌려 버렸으면 합니다.」
김삿갓은 일순간 눈앞이 아뜩해 왔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가문도 그렇고, 신랑감도 그렇고............... 거절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인들이 서로 좋아했으면 그만이지, 케케묵은 가문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김삿갓은 한동안 실의에 잠겨 있다가, 문득 한숨을 쉬며 혼잣말로 이렇게 탄식하였다.
「이 혼사가 성립되지 않으면 여러가지로 복잡한 사건이 발생할지도 모르겠는걸.」
현 진사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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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78 회
「혼인이 성사되지 않으면 복잡한 사건이 발생하다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김삿갓은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실상인즉, 본인들을 위해 이런 말씀을 아니할 생각이었읍니다 마는,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부득이 모든 사실을 까놓고 말씀 드려야 하겠습니다. 댁의 마님과 봉헌 영감님의 아드님은 부모들도 모르게 오래 전부터 밀회(密會)를 해오고 있는 사이랍니다. 저는 신랑 될 사람에게서 그 얘기를 직접 들었읍니다.」
김삿갓은 최후의 수단으로 폭탄 같은 선언을 던저 보았다. 그래 야만 일이 풀린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 진사는 그 말을 듣고 기절초풍을 할 듯이 놀란다.
「뭐, 뭐라구요? 우리 집 아이가 나도 모르게 남의 집 총각과 밀회를 해오고 있었다구요? ...... 우리 아이는 그럴 리가 없읍니다.」
「그런 일이 있고 없는 것은 따님에게 물어 보시면 대번에 아시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김삿갓은 그동안에 본인들 사이에는 서신 왕래까지 있었던 것을 침소봉대(針小棒大)식으로 장황하게 늘어놓고 나서.
「만약 이런 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댁의 따님을 며느리로 데려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옵니다. 나는 그런 점을 감안하여, 이왕이면 좋아하는 젊은이들까지 결합시켜 주는 것이 좋으리라 싶어서 중신을 나섰던 것이옵니다. 그러나 진사 어른께서 반대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나는 그만 돌아가겠읍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였다.
그러자 현 진사는 크게 당황한 빛을 보이며 김삿갓의 소매를 창황히 붙잡는다.
「잠깐만.」
김삿갓의 폭탄 선언이 현 진사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현 진사는 김삿갓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안방에 깊숙이 들어앉아 글 공부만 하고 있는 자기 딸이, 설마 외방 총각과 밀회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는데 어떡하랴.
「삿갓 선생! 선생은 혹시 다른 집 처녀가 밀회하는 것을 우리 집 아이로 잘못 알고 하신 말씀은 아닙니까.」
김삿갓은 고개를 단호하게 흔들었다.
「이런 중대사를 잘못 알고 입을 함부로 놀릴 리가 있겠읍니까. 댁의 따님이 조 총각에게 <籍>자라는 단 한 글자만의 답장을 써 보낸 것도 내 눈으로 분명히 보았읍니다. 조 총각은 그 편지를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으니까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그 편지를 직접 보여 드릴 수도 있겠읍니다.」
그 소리에 현 진사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籍>자라뇨?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답장이라는 말씀입니까.」
「저 역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편지인지 전연 알 길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영감으로 통하는 점이 있는지, 조 총각은 그 편지를 대번에 알아보고 두 사람이 기쁘게 만났다니,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籍>자가 무엇을 뜻하는 편지였다는 말씀입니까.」
「조 총각의 말에 의하면 <籍>자는 <竹來++一日>, 즉 <스무 하 룻날 대나무밭에서 만나자>는 뜻이라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 입니까.」
현 진사는 그 말에 또 한번 놀랐다.
「아니, 지금 겨우 《사략》을 읽고 있다는 그 총각이 자기 능력으로 그 편지의 뜻을 해득했다는 말씀입니까.」
어시호 김삿갓은 큰소리를 치고 나왔다.
「진사 어른은 그 총각의 학력을 우습게 여기시는 모양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신동(神童) 같은 소년이었읍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 소년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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