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99 회
「에끼 이 친구야, 옛날 친분을 생각해서도 자네가 나를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 나 백광석 (白光錫) 일세. 자네가 성까지 바꿔 가면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생면부지의 사나이가 얼토당토 않은 고집을 부리니 김삿갓은 매우 난처한 실정이었다. 김삿갓은 광석이라는 사나이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 잡아 주려고 짐짓 웃음을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아마 이 서방이라는 양반이 나하고 얼굴이 어지간히 닮은 모양이구료. 그러나 나는 이 서방이 아니고 김 서방이오. 얼굴이 비슷해서 그런 착각을 일으키는 모양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다른 데가 있을 것이오. 내 얼굴을 자세히 보시오.」
그리고 김삿갓은 얼굴을 일부러 내밀어 보였다.
백광석이라는 사람은 김삿갓의 알굴을 면구스러울 정도로 요모조모 점검해 보더니, 문득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내가 노형에게 큰 실수를 했소이다. 내 친구는 왼편 볼에 커다란 점이 있는데, 노형의 얼굴에는 검은점이 없군요. 내가 실수를 했으니 용서하시오. 이러나저러나 노형은 내 친구와 어쩌면 얼굴이 그렇게도 닮으셨소. 그래 그런지, 노형은 처음 만나는 사람 같지가 않구료. 그런 의미에서 한잔 합시다.」
어쩐지 행실이 수상쩍다 싶었지만, 김삿갓은 술을 싫다고 할 생각은 없었다.
「좋소이다. 나는 이 서방은 아니지만 친구가 따로 있겠소. 우리도 오늘부터 친구가 되면 그만일 것이오.」
「옳으신 말씀이오. 김 서방이거나 이 서방이거나 모두가 사람이기는 매일반일 것이요. 하하하.」
백광석은 호탕하게 웃어 보이고 나서, 문득 주모를 쳐다보며 수작을 부린다.
「주모는 성을 뒤라고 하오? 설마 성이 주가는 아니겠지」
주모는 가볍게 나무라 보이며,
「여보세요. 성을 갈면 개자식이라는 말도 모르시오? 누구를 개자식으로 만들려고 그런 농담을 하시우」
「주가가 아니란 말이구요. 그러면 진짜 성은 뭐라고 하오?」
「내 성은 천씨(氏)라오. 본관은 영양(陽)이구요.」
그 말을 듣자, 김삿갓이 얼른 중간에 끼어들며 말한다.
「천씨라면, 임진왜란 당시에 많은 공적을 올린 사암(思庵) 천만리(주)의 후손인가보구요?」
주모는 그 말에 크게 기뻐하며,
「어머나! 손님은 우리 가문의 내력을 잘 아시네요.」
그러나 백광석은 뭐가 못마땅한지 입술을 비쭉거리며 대뜸 시비조로 나온다.
「주모는 왜 그렇게도 건방지지?」
「성이 뭐냐고 묻길래 사실대로 대답했을 뿐인데, 뭐가 건방지 다는 거예요?」
「왜 건방지다는 것인지 몰라서 묻나. 내 성이 백가인데, 주모의 성은 내 성보다도 열 갑절이나 높은 천가라고 하니, 그런 건방진 성이 어디 있어. 오늘부터는 <千> 자의 대가리를 툭 쳐버리고 <十歌 >라고 해요. 그래야만 격에 어울릴 거야. 내 말 알아듣겠지.」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주모의 성을 가지고 생트집을 부리는 바람에 김삿갓은 배를 움켜잡고 옷을 밖에 없었다.
김삿갓은 한바탕 웃고 나서, 화제를 돌리려고 백광석을 이렇게 달랬다.
「성이라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도 없이 피동적으로 타고나게 되는 것인데, 남의 성을 가지고 나무라면 어떡하오. 천 가면 어떻고 백가면 어떻소. 사람은 다 마찬가진걸.. 나는 그보다도 노형에게 궁금한 일이 하나 있소이다.」
백광석은 술을 한잔 들이켜고 나서 반문한다.
「뭐가 궁금하다는 말씀이오.」
김삿갓이 말한다.
「노형은 아까 이 집에 들어설 때에 계집년들 등쌀에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혼자 화를 내지 않았소. 계집년들의 등쌀이 어째서 살 수 없다고 했는지 그 얘기를 좀 들어 봅시다.」
그러자 백광석은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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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100 회
「그 얘기 말인가요. 그 얘기라면 창피스러워서 말도 하고 싶지 않소이다.」
「말을 할 수 없다니까 점점 알고 싶구료. 우리끼리 창피스러울 게 뭐가 있겠소. 이왕이면 한번 들어주구료」.
백광석은 문득 생각이 달라졌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기는 사내들이란 내남없이 모두가 꼭같은 동물들이니까. 노형도 내 얘기를 들어 두면 많은 참고가 되실 것이니, 잘 들어 보시오.」
그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백광석은 지금 큰마누라와 작은마누라를 한집에 데리고 살기 때문에, 두 여인들 간에는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이날도 큰마누라와 작은마누라가 머리채를 움켜잡고 이년 저년 하며 대판으로 싸우고 있었다. 백광석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잘 잘못은 하여간에 어느 편을 나무라고 어느 편을 두둔 할 수도 없는 형편이 아닌가.
백광석은 생각다 못해 작은마누라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건넌 방으로 끌고 오며 이렇게 호통을 놓았다.
「이년아! 너 같은 계집년은 숫제 죽여 버려야 하겠다.」
그래야 대의명분이 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작은마누라를 건넌방으로 끌고 건너왔을 때, 젊은 계집이 탐스러운 젖통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을 보자, 백광석은 별안간 욕정이 솟구쳐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낮거리를 정신없이 시작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방문이 홱 열리더니, 큰 마누라가 비호같이 덤벼들어 사나이의 등덜미를 움켜잡고 끌어내리며 다음과 같은 호통을 치더라는 것이었다.
「이 잡놈아! 저년을 이런 식으로 죽여 주려거든 나를 죽여 주지 않고 왜 저년을 죽여 주느냐.......」
김삿갓과 주모는 그 말을 듣자 배꼽을 움켜잡고 웃었다.
「하하하, 두 마누라를 거느린다는 것은 정말 예삿일이 아닌가 보구료.」
주모도 웃어 가며 덩달아 말한다.
「호호호, 이왕이면 공평 무사하게 큰마누라도 죽여 주지 그랬어요.」
「에이 여보시오, 나를 물개로 아시오.」
그 바람에 방안에는 또다시 웃음판이 벌어졌다.
김삿갓이 백광석에게 묻는다.
「큰마누라는 작은마누라의 배 위에서 덜미를 움켜잡아 끌어내리며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다는데 어찌 하였소.」
백광석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한다.
「다 늙어빠진 마누라를 무슨 흥미로 죽여 주오. 큰마누라한테 흥미가 없어서 부득이 작은마누라를 얻어 오게 된걸요.」
그러자 주모가 정색을 하며 백광석을 나무란다.
「그건 너무 하시우.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하지 않아요. 작은마누라만 죽여 주고 큰마누라는 돌아보지도 않으면, 큰마누라가 얼마나 원통하겠어요.」
「워낙 많이 써먹어서 둘레가 닳고 닳아 못 쓰게 되어 버린 걸 어떡하느냐 말요.」
주모가 화를 내며 반기를 든다.
「모르는 소리 그만하시오. 여자는 화로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화로는 평소에는 냉랭하지만 숯불을 활짝 피워 주기만 하면 언제든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법이에요. 당신네들은 그런 비결을 모르고, 마누라가 사십만 넘으면 젊은 마누라를 얻어 오기에 바빠하니, 본마누라들이 얼마나 복통을 할 노릇이 에요.」
김삿갓은 주모의 말을 듣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하하하, 여자가 화로와 같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 학설이구료. 듣고 보니 과연 이치에 합당한 소리요. 주모는 지금이라도 누가 불을 지펴 주기만 하면 뜨겁게 달아오를 자신이 있단 말이죠?」
주모도 소리 내어 웃으며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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