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은 1980년 8월21일부터 1981년 2월24일까지 7개월 동안 최규하의 잔여임기를 채웠다❤️
그리고 유신헌법에 보장된 7년 동안의 임기인 1981년 2월25일부터 1988년 2월24일까지 제12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가 취임했을 때 한국경제는 임종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세계는 예외 없이 1974년의 제1차 오일쇼크에 이은 제2차 오일쇼크에 휩싸였다.
빚이 많은 기업들은 고환율에 시달렸다.
도매물가 상승률이 44.2%,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까 돈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너도나도 사재기를 했다.
사재기를 하니까 상품과 곡식이 품귀현상을 일으켜 물가는 더욱 가파르게 올랐다.
한국경제가 ’한강의 기적‘ 이라는 명성을 얻자 해외 은행들은 한국기업이 꿔 달라면 달라는대로 마구 꿔줬다.
기업들은 대개 기계를 사용하는 조립기업들인데다 공단에 옹기종기 몰려있어 서로 질투를 했다.
새로운 제작기계들을 수입하는 데 경쟁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중복투자를 하다 보니 생산이 과잉되어 공장 가동률이 10% 이내로 추락 했다.
이웃에 자랑했던 비싼 기계들이 애물단지가 되었다.
돈이 벌리지 않는 기업들은 외채를 갚을 능력이 없어 외채를 얻어 이자를 갚는 처지들이 됐다.
기업에는 돈이 고갈되고,
개인들은 사재기에 돈을 써버리기 때문에 저축이 없었다.
저축이 없으니 기업들은 한국의 은행에서 돈을 꾸지 못하고 외국은행에서만 돈을 꾸어썼다.
IMF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 말기의 한국경제였다.
경제를 아는 모든 식자들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로 이런 경제의 임종시기에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올라섰다.
그는 육사생도 시절에 축구선수였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경제를 알겠느냐고 걱정들을 했다.
군 출신이 물이 빠진 경제를 무슨 수로 건져올릴 수 있겠느냐, 한참 걱정들을 하고 있을 때,
전두환은 어이없게도 88 국제올림픽을 유치하겠다며 팔을 걷어 부쳤다.
“석두야, 석두~ 미치지 않고서야~ 에휴~ 답답해…”
하지만 그는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드디어 그는 만세를 불렀다.
1981년 9월30일, 독일의 남쪽도시 바덴바덴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서울 52표, 나고야 27표로, 서울을 88올림픽 개최지로 선포한 것이다.
전두환은 환희에 차 있었지만 주위의 모든 참모들과 각료 들은 감당할 대책이 없어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전두환에게 대책은 있었는가?
도대체 무슨 돈으로, 도대체 무슨 실력으로 경제를 극복하고 그 많은 투자비를 마련하겠다는 말인가!
1981년 1월20일, 전직 영화배우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전두환은 레이건에게서 돌파구를 찾으려했다.
너무나 엉뚱해서 누구와 의논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가까이 지냈던 초대 연합군사령관 베시 대장에게 간곡히 부탁해 레이건을 빨리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전두환은 레이건을 유혹하기 위해 두가지 낚싯밥을 전했다.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해왔던 핵무기 개발을 일체 중단하고, 핵을 에너지로만 사용하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한했던 자유를 대폭 완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레이건 대통령이 매우 반길 수 있는 미끼였다.
여기에 더해 레이건은 대 공산권 매파였고, 전두환도 대 공산권 매파라 코드가 일치했다.
레이건에게는 ’회색주의자인 카터‘가 어지럽힌 동맹관계를 복원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급선무였다.
수많은 동맹국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모범적인 동맹이 한국이었고, 한국은 미국 외교정책의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였다.
그래서 레이건은 외국 정상 중 가장 먼저 전두환을 만나기로 했고, 만나는 그 날은 취임한지 불과 13일 만인 2월2일이었다.
“각하, 세계 정상들 중에서 본인을 가장 먼저 만나주신 것은 본인에게 크나큰 영광입니다.
각하께서 미합중국 대통령 으로 취임하시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각하, 저는 각하를 도와 드리고 싶어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이 엉뚱한 말에 회담장에 있는 미국사람들은 물론 동행했던 참모진과 장관들 모두가 놀라고 긴장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제까지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 원조 액수를 늘려달라, 신형 전투기를 사게 해달라는 등 아쉬운 말부터 했는데, 그런 한국이 무엇을 가지고 미국을 도와주겠다는 것인가?
회담공간에 숨소리조차 멎어있었다.
“각하, 죄송한 질문이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주 연간 GNP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정상회담에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레이건도 모르고, 그 자리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또 다시 장내는 고요하게 얼어붙었다.
“각하, 제가 알아봤더니 연간 800억달러입니다.
그럼 대한민국의 연간 GNP 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또다시 조용해졌다.
“600억달러입니다.”
모두가 놀랍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한국의 GNP가 미국의 1개주의 것보다 적다니!
“그럼 일본의 연간 GNP는 얼마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몰랐다.
1조 1,600억달러,
한국GNP의 20배입니다.“
“각하,
대한민국은 자유진영의 최일선에서 이 보잘 것 없는 GNP에서 매년 6%를 떼어내 공산세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가 거의 파탄날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반면 부자나라 일본은 GNP의 0.09%만 떼어내 방위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분명 땀을 흘리는 대한민국의 그늘에서 무임승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미국의 돈을 달라하지 않습니다. 일본 돈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그 돈으로 저는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도 사고 탱크를 사겠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신선한 충격을 느낀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얼마가 필요하신가요?”
“일단 일본에 각하의 뜻만 알려주십시오. 액수는 실무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이 말에 가장 놀란 사람들은 대통령을 수행한 참모진과 장관들이었다.
자기들로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돈키호테식 발상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자기들끼리 너무 엉뚱하다며 수근들 댔다.
그 후 2개월이 지났다.
1981년 4월22일, 전두환은 외무라인을 통해 일본 스즈키 수상에게 100억달러 청구서를 보냈다.
일본측 역시 경기를 일으켰다.
”뭐라고? 100억달러?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은거 아냐?
10억달러라 해도 너무 무례하지,
도대체 근거가 뭐야? 무례가 지나치구먼.
대꾸도 하지마“
전두환 주변에서도 전두환은 매우 엉뚱하고 이상한 사람 이라고 수근댔다.
국제망신이라고까지 했다.
이듬해인 1982년 1월27일에 ’나카소네‘가 수상에 올랐다.
나카소네는 관례에 따라 서둘러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러갔다.
그리고 1년 후인 1983년 1월11일, 나카소네가 한일 정상회담을 제안해 한국을 방문하여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그동안 일본은 사실 한국에 대해 미안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제가 최소한 60억달러 정도를 마련해보려고 백방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60억달러를 마련 하려면 제 위치가 흔들릴 수 있어서 최대한으로 마련한 것이 40억 달러입니다.
이 돈을 수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8년 전인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서 받아낸 돈이 8억달러이다.
40억달러면 5배가 아니던가!
나카소네는 전두환보다 13년 연상이다.
이후 전두환과 나카소네는 친구처럼 형제처럼 우정을 나누었다.
전두환이 임기를 끝내자 레이건과 나카소네는 각기 사인이 된 전두환을 초청해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런 대접 받은 사람이 우리 나라엔 전두환 말고 없다.
한강은 서울의 아이콘이다.
1965년에 350만이었던 인구가 팽창하여 천만이 되었다.
상수도 소요량이 팽창했지만 그 취수원인 한강은 날이 갈수록 오염이 심화되었다.
공장폐수, 축산폐수, 인분이 유입되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논과 밭으로부터 또다른 축산물의 인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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