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하늘을 나는 날개를 달아 준 라이트 형제
평생 독신으로 청빈생활… “참 신앙 본보기
사람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소망은 원초적 욕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노아 홍수 전후에는 사람들이 이들 괴조들을 가축처럼 길들여서 날고 싶은 욕구를 일부 나마 채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나라에 거대한 새와 새를 부리는 사람들에 관한 전설이 남아 있으며 특히 인디언들에게는 거대한 새에 관한 생생한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라이트 형제가 동화처럼 느껴지는 이런 인류의 오랜 소원을 이룬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미국의 언론인 루드윅은 『그들은 우리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고 직설적으로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였다(1985).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알려지고 있는
윌버 라이트(1867∼1912)와 오빌 라이트(1871∼1948) 형제는
미국 연합형제단 교회의 청빈한 목사였던 밀턴 라이트의 셋째와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들 형제가 처음으로 비행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79년 부친이 여행선물로 프랑스의 페노라는 사람이 고안한 장난감 헬리콥터를 선물한 이후부터라고 알려지고 있다.
비록 장난감이었지만 헬리콥터의 모형은 연날리기를 무척 좋아하던 이들 10대 소년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들은 곧 지방의 연날리기클럽에도 가입하게 된다.
이들 두 형제는 공부도 무척 잘했는데,
원래 형 윌버는 예일대에 진학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려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스하키 도중 그만 거의 모든 이빨이 부러지는 커다란 사고를 당하고 만다.
대학을 진학하지 않은 이들 형제는 오하이오주의 기계제작소 신문인쇄소등을 전전하다가 1892년 자전거 판매업소를 시작한다.
당시 자전거는 영국과 독일 프랑스의 치열한 개발 경쟁끝에 50여년 전 영국의 맥밀란이 페달이 달린 자전거를 개발하여 신속하게 전파되고 있는 중이었다.
손재주가 많은 이들 형제에게 자전거 제작은 수지도 괜찮고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역시 비행기의 제작이었다.
1895년께 라이트형제는 릴리엔탈이 지은 책을 읽게 되는데,그는 글라이더의 전문가로 2천회에 달하는 비행 실험의 경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릴리엔탈은 그만 1896년 시험중이던 비행기의 추락으로 사망하고 만다.
1899년 과학지식을 보급하는 국가기관인 스미소니언협회에 편지를 보내는등 라이트형제는 꾸준히 비행에 관한 자료를 입수하면서 비행기의 제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1900년에는 사람의 몸을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글라이더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조종하느냐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였다.
『하나님이 만드신 나는 기계인 새가 있지 않은가』
형 윌버에게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관찰이 용이한 날을 하루 잡아서 자신이 살던 오하이오주 데이튼의 들판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랜 관찰끝에 새들은 수시로 날개의 모양을 바꾸어가면서 상하좌우 여러 방향으로 날며 속도도 조종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행기도 좌우의 날개면에 변화를 준다면 새처럼 불편없이 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기체가 좌우로 기울었을 때 떠오르는 힘에 차이가 생기게 함으로써 기울기를 줄이는 방법으로 오늘날에도 모든 비행기에 응용되고 있는 보조날개의 원리였다.
1900년 6월 라이트 형제는 이것을 연과 글라이더 실험을 통하여 거듭 확인하게 된다.글라이더에는 동생 오빌이 엎드려 탔으며 언덕위를 미끄러져 30m를 날아 잔디위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라이트형제도 독자적인 비행기연구를 계속하여 랭글리가 비행실험을 하던 그해 12마력의 엔진을 개발해 놓고 있었다.
라이트 형제는 이 엔진으로 두 개의 프로펠러를 돌릴 수 있도록 비행기를 제작하였다.
랭글리가 비행실험을 시도하다 실패를 한지 며칠 되지도 않은 1903년 12월17일 라이트 형제는 비행을 계획하게 된다.
날씨도 추웠던데다 랭글리의 비행실험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버린 후라 언론과 대중들은 학벌도 시원찮은 이들 형제의 실험에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더욱이 어느 누구의 경제적 도움도 없는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제작된 비행기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면에는 그들 형제의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고 조용한 성격에도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고지식하고 청빈한 목사였던 라이트 형제 아버지의 영향이 많았던 것 같다.
『밀턴 라이트(라이트 형제의 아버지)목사는 성경이 그들 자녀들에게 미친 긍정적 효과에 관하여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롤스 로이스 자동차회사의 공동 설립자였던 로이스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튼 라이트형제의 이 유명한 역사적 비행실험에는 겨우 5명의 구경꾼만이 참석하였다.
「라이트 비행기」라 명명되고 동생 오빌이 탄 이 비행기는 1차 실험비행에서 12초동안 37m를 날았다.
역사적 비행은 이렇게 그들의 성격대로 아주 조촐(?)하게 마감된 것이다.
「라이트 비행기」는 그 다음 2차 실험에서는 59초 동안 2백60m나 비행하였다.
모든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1908년 윌버는 유럽으로 건너가서 프랑스에서 그 위용을 세상에 공개적으로 과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해 사고로 승객이 죽고 오빌이 다치는 사고도 발생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라이트 형제는 1909년 비행기 생산을 위한 항공회사도 설립한다.
1909년 7월25일에는 1개의 날개를 가진 단엽기가 영국과 프랑스사이에 있는 도버 해협을 37분 만에 횡단에 성공한다.
항공산업의 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목사인 아버지 덕분으로 어린 시절 일찍이 주님을 영접하고 일생동안 술과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으며 그 당시 흔하던 도박에도 전혀 손한번 대지 않고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살아간 이들 형제의 모습은 오늘날 물질적 욕구에만 눈이 어두워 어수선한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대비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도 우애가 깊던 이들 형제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형 윌버는 1912년 5월30일 45세,동생 오빌은 1948년 1월30일 77세에 주님곁으로 갔다.
<조덕영·한국창조과학회 전임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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