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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낮엔 폭염(暴炎)과 밤엔 열대야(熱帶夜)도 시간의 위력(偉力)에 밀려 맥없이 뒷거름질 치는듯 한 요즈음.
조석(朝夕)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조금 불어오니 오늘은 아침부터 다소 쌩뚱맞지만 지인께서 보내주신 구수한 옛날 이야기 한토막 옮겨봅니다.
지극 정성이면 하늘도 감천(感天)이라.
조선 영조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거지 꼴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민정을 살피고 탐관 오리들을 벌 주던 때였습니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렀는데,
봉놋방에 들어가 보니 한 거지가 큰 대자로 퍼지르고 누워 있었다.
(봉놋방)은 여러 나그네가 한데 모여 하루밤 자고가는 주막집의 큰 방, 즉 합숙소 같은곳.
사람이 들어와도
본 체 만 체 밥상이 들어와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사 박문수가 말했다
댁은 저녁 밥을 드셨수?
아니요 돈이 있어야
밥을 사 먹지.
그래서 어사 박문수는
밥을 한상 더 시켜 주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도
밥을 한상 더 시켜서 주니까 거지가 먹고 나서 말을 꺼냈다.
보아하니 댁도 거지고
나도 거진데 이럴게 아니라 같이 다니면서 빌어먹는게 어떻겠소?
박문수도 영락없는 거지 꼴이니 그런 말을 할만도 했다.
그래서 그 날부터 두 사람은 같이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날 제법 큰 동네로 들어서니 마침 소나기가 막 쏟아졌다.
그러자 거지는 박문수를 데리고 그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왓집으로 불쑥 들어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지금 이 댁 식구 세 사람 목숨이 위태롭게 됐으니 잔말 말고 나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지금 당장 마당에 멍석을 깔고 머리 풀고 곡을 하시오.
안 그러면 세 사람이 죽는다고 하니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때 이 집 남편은 머슴 둘을 데리고 뒷산에 나무를 베러 가 있었다.
어머니가 나이 아흔이라 미리 관(棺)을 짤 나무나 장만해 놓으려고 간 것이다.
나무를 베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비를 피한다고
큰 바위 밑에 들어갔다.
그 때 저 아래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보다
얘들아 어서 내려가자.
머슴 둘을 데리고 부리나게 내려오는데 뒤에서 천둥소리가 나더니 벼락에 바위가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위험을 모면하고 내려온 남편은 전후 사정을 듣고 거지한데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우리 세 사람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겠소?
정, 그러면 돈 백 냥만 주시구려.
그래서 돈 백 냥을 받았다
받아서는 대뜸 박문수에게 주는 게 아닌가.
이거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 데가 있을 테니.
박문수가 가만히 보니
이 거지가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돈 백 냥을 받아서 속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
다시 며칠을 지나서 어떤 마을에 가게 됐다.
그 동네 큰 기와집에서 온 식구가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거지가 박문수를 데리고 그 집으로 쑥 들어갔다.
이 댁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리 슬피 우시오?
우리 집에 7 대 독자
귀한 아들이 있는데
이 아이가 병이 들어 죽어가니 어찌
안 울겠소?
어디 내가 한 번 봅시다
그러더니 병 든 아이가 누워 있는 곳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곧장 사랑채로 들어가선 주인에게 말했다.
아이 손목에 실을 매어 가지고 그 끄트머리를 가져오시오.
미덥지 않았으나
주인은 아이 손목에다 실을 매어 가지고 왔다.
거지가 실 끄트머리를 한 번 만져 보더니
뭐 별것도 아니구나
거 바람벽에서 흙을 한줌 떼어 오시오.
바람벽에 붙은 흙을 한줌 떼어다 주니
동글 동글하게 환약 세 개를 지었다.
주인이 약을 받아 아이한테 먹이니 다 죽어가던 아이가 말짱해 졌다.
주인이 그만 감복해서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7대 독자 귀한 아들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내 재산을 다 달란대도 드리리다.
그런 건 필요 없고
돈 백 냥만 주구려.
이렇게 해서 백 냥을 받아 가지고는 또 박문수를 주었다.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 데가 있을 거요.
다시 길을 가다가 보니 큰 산 밑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웬 행세 꽤나 하는 집에서 장사 지내는 것 같았다.
기웃기웃 구경하고 다니더니 마침 하관을 끝내고 봉분을 짓는 데 가서
에이, 거 송장도 없는 무덤에다 무슨 짓을 해?
하고 마구 소리를 쳤다.
일하던 사람들이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네 이놈 그게 무슨
방정맞은 소리냐
이 무덤 속에 송장이 있으면 어떡할 테냐?
아, 그럼 내 목을 베시오
그렇지만 내 말이 맞으면 돈 백냥을 내놓으시오.
일꾼들이 달려들어 무덤을 파헤쳐 보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과연 방금 묻은 관이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그걸 찾아 주려고 온 사람이오 염려 말고 북쪽으로 아홉자 아홉치
떨어진 곳을 파보시오.
그 곳을 파 보니 아닌게 아니라 거기에 관이 턱 묻혀 있었다.
여기가 명당은 천하 명당인데
도시혈(逃屍穴) (시체가 움직여 다른곳으로 도망가는 혈)이라서 그렇소 지금 묻혀 있는 곳에 무덤을 쓰면 복 받을 거요.
이렇게 해서 무사히 장사를 지내고 나니
상주들이 고맙다고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명당 자리를 보아 주셨으니 이 은혜를 어떠게 갚아야 할지요?
아, 다른건 필요 없으니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또 돈 백냥을 받아서
다시 박문수에게 주었다.
이것도 잘 간수해 두시오. 반드시 쓸데가 있을 거요.
그리고 나서 또 가는데,
거기는 산중이라서 한참을 가도 사람사는 마을이 없었다.
그런 산중에서 갑자기 거지가 말을 꺼냈다.
자, 이제 우리는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 되겠소.
이 산중에서 헤어지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오?
염려 말고 이 길로 쭉 올라가시오.
가다가 보면 사람을 만나게 될 거요.
그리고는 연기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한참 동안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장승하나가 떡 버티고 서 있었고
그 앞에서 웬 처녀가
물 한 그릇을 떠다놓고
빌고 있었다.
장승님 장승님, 영험하신 장승님 우리 아버지 백일 정성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한시 바삐 제 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박문수가 무슨 일로 이렇게 비느냐고 물어보니
처녀가 울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관청에서 일하는 아전이 온데
나랏돈 삼백 냥을 잃어버렸습니다.
내일까지 돈 삼백 냥을 관청에 갖다 바치지 않으면 아버지 목을 벤다는데, 돈을 구할 길이 없어 여기서 백일 정성을 드리는 중입니다.
박문수는 거지가 마련해 준 돈 삼백냥이 떠올랐다.
반드시 쓸 데가 있으리라 하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생각했다.
돈 삼백 냥을 꺼내어 처녀한테 건네 주었다.
자, 아무 염려 말고
이것으로 아버지 목숨을 구하시오.
이렇게 해서 억울한 목숨을 구하게 됐다.
그런데 그 처녀가 빌던 장승이 비록 나무로 만든 것이련만 가만히 살펴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조금 전까지 같이 다니던 그 거지 얼굴을 쏙 빼다 박은 게 아닌가 ! ...
어린시절 여름밤 모기불 연기가 자욱한 마당에서 은하수를 쳐다보며 할아버지께 들었던 아련한 옛날 이야기 였습니다.
요즈음 신종 코로나가 창궐해 대형병원 응급실에 몰려드는 환자들로 심상치 않은 모양입니다.
항상 건강관리 잘하시고 무탈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2024년 8월 28일
수요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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