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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7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3. 18. 16:28

방랑시인 김삿갓 1-7 회

'한 유는 가도로부터 충돌하게 된 연유를 듣고 나더니 크게 웃으며,

「퇴(推)자보다는 고(敲)자가 월등하게 좋소이다.」

하고 말하여 그때부터 <퇴고>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시를 지을 때에는 하나하나의 글자를 엄밀하게 골라 써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말이란 어 해 다르고 아 해 다르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시어(詩語)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이랴

그러나 시를 짓는 태도가 누구나 똑같은 것은 아니다. 가령 이태백 같은 시인은 술이 취하면 시를 주정하듯이 읊어 대었건만 어느 한 편의 시도 걸작이 아닌 것이 없다.

그는 <퇴고〉라는 것을 생각조차 안 해본 시인이었다. 이태백은 어쩌면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난 시성(詩聖)이었기 때문이리라. 김병연도 말하자면, 이태백과 같은 형의 시인이었다.

그야 어쨌건 김병연은 백일장을 일찌감치 끝내고 밖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갈 데가 없었다. 그는 급제를 하거나 낙방(落榜)이 되거나 별로 개의할 바가 아니기는 하였다. 

그러나 <장원 급제〉를 해 가지고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성적 발표도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김병연은 목이 컬컬해 와서, 불현듯 술 생각이 간절하였다. 

(시간도 보낼 겸 술이나 한잔 했으면 싶은데, 이 부근에 술집이 없을까.)

산기슭을 감돌며 술집을 찾아보니, 마침 저만큼 외딴 산골짜기에 취옹정<醉翁亭>이라는 주막이 눈에 띄었다.

(취옹정이라? ...... 술집 이름치고는 멋들어진 이름이구나. 옛날 송(宋)나라의 문호(文豪) 구양수(歐陽修)가 별호(別號)를 <취옹(醉翁)이라고 자칭(自稱)해 왔었는데, 구양수가 이 산골에 와서 술장사라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김병연은 술집 이름에 호기심이 끌려,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며 큰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그러자 방문이 탕, 열리며 머리를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젊은 여인이 밖을 내다보더니,

「이리 오너라 라고 부르시는 걸 보니, 서울서 오신 양반이신가 보네요. 목로술집에 오시면서 이리 오너라는 다 뭐예요, 호호호」

하고 간드러지게 웃는다.

나이는 22, 3세 가량 되었을까, 콧날이 오똑 솟고 이목구비가 반듯한 것이,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계집이었다.

방안에 들어와 보니 저쪽 모퉁이에서는 70이 가까와 보이는 맨상투 바람의 늙은이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이미 취기(醉氣)가 몸롱해 있었다.

젊은 계집을 주모(酒母)라고 보기에는 나이가 너무도 어리기에 김병연은 아랫목에 털썩 주저앉으며,

「술 한잔 가져 오게! 주모는 어디 갔는가?」

하고 물었다.

젊은 계집은 도토리묵 한 접시에 북어 한 개가 놓여 있는 술상을 들고 들어오더니. 김병연의 앞에 덜렁 놓으며 대답한다.

「우리 집에 여자는 나 하나뿐이에요. 성은 주씨 (酒氏)고, 이름은 모(母)라고 불려 주세요.」

김병연은 그 말에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다.

「하하하! 아따, 자네는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네그려. 자네가 바로 주모란 말이지?」
「주모면 어떻고, 주모가 아니면 어때요. ......어서 술을 드세요. 」

김병연은 술을 마시며 수작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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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8 회

「주모치고는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얼굴이 너무도 예뻐서 큰일인걸」
「손님은 걱정도 팔자시네. 남정네들은 어리고 예쁜 계집일수록 좋아한다면서요. 그러잖아도 저는 아침부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침부터 나를 기다리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올 것을 어떻게 알고 기다렸다는 말인가.」

김병연은 계집의 수작이 멀쩡한 거짓말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다렸다는 말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계집은 시치미를 떼고,

「어젯밤 꿈자리가 무척 좋았거든요. 그러니까 안 기다릴 수가 있어요?」
「꿈자리가 좋았다니? 어떤 꿈을 꾸었기에 그러는가?」

계집은 그 말에는 대답을 아니하고 엉뚱한 소리를 지껄인다. 

「서울 양반들은 눈 감으면 코를 베먹는다던데, 손님은 서울 양반이면서도 어수룩한 분 같으시네요」
「주모는 어디서 그런 못된 소리만 얻어들었는가, 서울 사람이라고 모두가 코를 베먹을라구. 때로는 나같이 어수룩한 친구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주모는 살랑살랑 도리질을 해가면서.

「손님은 서울 양반이 돼 그런지, 깍정이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요」
「이 사람아! 내가 자네한테 무슨 깍정이질을 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깍정이가 아니라면 술을 혼자만 마시지 말고 저한테도 한잔 주세요.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생겨날 게 아니겠어요」 
「아 참, 그렇던가. 그렇다면 한잔 주지. 자네는 말만 잘할 뿐 아니라 술도 잘하는 모양이지?」
「술장사하는 계집이 술을 못 마시면 어떡해요. 주모가 술을 많이 마셔야만 셈(賣上高)이 올라갈 게 아니겠어요.」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라 셈을 올리기 위해 술을 억지로 마신다는 말이지? 그러고 보면 서울 사람은 코만 베먹지만, 자네는 사람을 통째로 잡아먹으려는 게 아닌가」

김병연은 주모를 상대로 그런 수작을 주고받으며 저만큼 앉아 있는 맨상투의 늙은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늙은이는 자는 듯 조는 듯, 아직도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모는 늙은 손님에게는 전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김병연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자, 계집에 대한 관심이 점점 깊어 갔다. 그리하여 술잔을 건네 주며 수작을 다시 걸었다. 

「술은 얼마든지 사줄 테니, 자네는 술을 마음껏 마셔 보게.」 

계집은 술잔을 받아 들고 방글 방글 웃으며,

「그런 말씀하시는 걸 보니, 손님은 어수룩한 게 아니라 무척 엉큼하시네요. 나를 취하게 만들어 놓고 욕심을 채워 보고 싶어 그러시는 거죠?」
「아따, 선남 선녀가 만났으니 욕심을 채우려 하기로 어떻단 말인가. 자네도 젊은 나이라, 나 같은 젊은 놈이 싫지는 않을 게 아닌가.」
「그건 그래요. 나도 오래간만에 젊은 양반을 만나니, 춘심(春心)이 발동하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인연이 없다면 모를까, 인연이 있다면 마음껏 놀아 보세요.」

주모는 금방이라도 옷을 활짝 벗고 덤벼들 것만 같은 기세다. 김병연은 그럴수록 어젯밤의 <꿈 이야기>와 자기를 <기다렸다> 는 말이 점점 궁금해 왔다.

「참, 아까 물어 보다 말았는데, 어젯밤에 꿈을 꾸었다는 것은 무슨 꿈인가. 그리고 나를 기다렸다는 말은 무슨 소린가.」

그러자 주모는 어이가 없는 듯 김병연의 얼굴을 잠시 멀거니 바라보다가,

「손님은 여태까지 그 생각만 하고 계셨나 보죠?」

김병연은 적이 겸연쩍었다.

「이 사람아! 자네가 알쏭달쏭한 소리를 지껄여 대니까 내 마음이 싱숭생숭해질밖에 없지 않는가.」
「제 말이 뭐가 알쏭달쏭했다는 말씀이에요. 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 뭐예요.」
「뭐가 어째서 당연하다는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날마다 안주를 마련해 놓고 손님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곳이 바로 술집인걸요. 제가 손님을 기다렸다는 것이 뭐가 알쏭달쏭하다는 말씀이에요.」

그 소리에 김병연은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떼기를 딱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