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23 회
그러나 세상만사는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던가. 그들이 곡산으로 피신해 간지 몇 해 만에 역적 김익순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들통이 나는 바람에 이씨 부인은 세 아들을 데리고 이번에는 경기도 광주(廣州) 땅으로 밤도망을 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오래는 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가평 (加平)· 평창(平昌). 여주(麗州) 등지로 전전하다가, 숫제 강원도 땅인 영월 산속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살길을 찾아 이사를 자주 다녔다>던 어머니의 말씀은 멀쩡한 거짓말이었고, 신분을 감추기 위해 마지못해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녔던 것이다.
시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참살(斬殺)되었을 때에도 이씨 부인 은 그런대로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살아왔었다.
그러나 백일장에 장원 급제한 것을 계기로 이제는 아들에게조차 희망을 걸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씨 부인은 그래도 절망은 하지 않았다.
(사람은 어떤 곤경에 빠져도 살기는 살아야 하는 것.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있지 않던가.)
이씨 부인은 좌절감에 빠져 있는 아들을 부추겨 세우고 조용히 말한다.
「병연아!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떤 짓을 해서라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네가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었다면 다른 길로 살아가면 될 거 아니냐」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 앞길을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김병연은 좌절감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씹어 뱉듯이 대꾸해 버렸다. 그것은 숨김없는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였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는 역적의 손자다. 게다가 조상에게조차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으니, 이러고서 무슨 낮짝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런 생각에서 죽어 버리고 싶은 충동만이 절실하였다.
이씨 부인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즉석에서 아들을 날카롭게 꾸짖는다.
「네가 정신이 있는 놈이냐. 사람의 목숨은 하느님이 점지해 주신 것. 하느님이 주신 목숨을 네 맘대로 끊어 버린다는 것이 말 이 되는 소리냐. 이 에미도 네가 괴로와하는 심정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이라도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너는 왜 모르느냐.
남자들은 어떤 위기에 봉착하면 십중팔구는 절망감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여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여자들은 절박한 곤경에 처할수록 싸워 이기려는 투쟁심이 강해진다.
어쩌면 그것은 생명을 잉태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는 명언은 그런 점에 근거를 두고 나온 말이리라.
지금까지 잠자코 울기만 하던 며느리 황씨도 남편 입에서 <죽겠다>는 말이 나오자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남편을 나무란다.
「죽기는 왜 죽어요. 못난 소리 그만하세요. 당신이 죽는다고 할아버님의 오명(汚名)이 씻겨진답디까. 당신이 그런 약한 소리를 하면 어린것과 나는 어떡하라는 말에요.」
김병연은 그 말을 듣자 별안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이 무얼 안다고 잔소리야. 당신은 잠자코나 있어요.」
그러나 아내는 잠자코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신이 죽는다는데 어떻게 잠자코 있어요. 어린 애기와 나는 당신만을 믿고 살아오는 사람이에요」
김병연은 할말이 없어 늦게 자리를 박차고 자기 방으로 건너와 버리고 말았다. 뒤미처 아내가 부랴부랴 따라 건너온다.
김병연은 자기 방으로 건너오기가 무섭게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홀렁 자빠져 버렸다. 그대로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아내는 잠시 동안 말이 없머니, 이불자락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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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24 회
「여보세요. 조반을 잡수셔야죠.」
김병연은 이불자락을 낚아채어 다시 뒤집어쓰며 쏘아붙인다.
「먹고 싶지 않으니 그냥 내버려두라구!」
아내는 그럴수록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시장화실 텐데 밥을 안 잡수시면 어떡해요. 옛날 일을 무얼 그렇게까지 상심하세요. 어머니의 말씀대로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떡하든지 살아야 할 게 아녜요. 학균 (翯均)이를 보아서도 당선은 용기를 내셔야 해요.」
그러나 김병연은 모두가 귀찮기만 하였다.
「죽지 않을 테니 제발 귀찮게 굴지 말아요.」
「죽지 않으려면 밤을 자셔야 할 게 아래요?」
한 끼쯤 안 먹는다고 당장 죽는 줄 아는가. 이따가 먹을 테니 지금은 그냥 내버려두라구!」
김병연은 바람벽을 향하여 돌아누워 버렸다. 이제 앞으로의 일을 조용히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역적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조상에 대해서도 패륜아(悖倫兒)가 아닌가. 그러한 내가 무슨 낮짝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김병연은 그날부터 끝없는 고민이 계속되었다.
어머니와 아내가 끼니 때마다 들볶는 바람에 마지못해 밥을 먹어 오기는 하지만, 죽고 싶은 생각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죽으려고 생각하니, 어머니의 신세가 불쌍해 견딜 수 없었다.
지금부터 이태 전의 일이었다. 동생 병호가 해소병으로 죽고 말았을 때, 어머니는 가슴이 얼마나 아팠던지, 열흘 동안이나 끼니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평소에는 생존력이 그렇게도 강렬하던 어머니였건만 그때만은,
「너희들이 없었다면 나는 병호를 따라 죽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고 말한 일까지 있었다.
(병호가 죽었을 때에도 그토록 상심한 어머니셨는데, 이제 나까지 죽어 버리면 어머니는 틀림없이 자결을 하고 말 것이 아닌가.)
그 일을 생각하면 죽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한 달 가까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민에 잠겨 있는데, 어머니는 그 꼴을 보기가 하도 딱했던지 어느 날은 아들을 이렇게 달래는 것이었다.
「애, 병연아! 방구석에 누워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 바람이라도 좀 쐬고 들어오려무나.」
그러나 김병연은 어머니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역적의 자손이 하늘이 부끄러워 어떻게 밖에 나타닙니까. 그 건 안 될 말씀입니다.」
김정현은 역적의 자손인 까닭에, 한낮에는 하늘이 부끄러워 밖에 나다닐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다르다.
「죄가 있으면 할아버님에게나 있을 뿐이지, 네게는 아무 죄도 없느니라. 그런데 뭐가 부끄럽단 말이냐」
김병연은 생각이 달랐다.
「역적의 자손이 어떻게 죄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너는 모든 일을 너무도 옹졸하게만 생각하는구나. 하늘을 보기가 부끄럽거든 밤에 다니면 될 게 아니냐..」
김병연은 어머니의 기발한 사고 방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낮에 나다니기가 부끄러우면 밤에 나다니면 될 게 아니냐>
는 말은, 좌절감에 빠져 있는 아들에게 어떡하든지 용기를 복돋워 주려는 어머니의 애정에서 나온 말이었으리라.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절묘한 말이기도 하였다.
김병연은 그 말에, 답답하던 가슴이 한결 트이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다시 말한다.
「젊은 나이에 방구석에 누워만 있으면 병이 생기는 법이다. 너는 본시 술을 좋아하지 않느냐.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오너라. 그러면 울화가 한결 풀릴 것이다.」
<술>이라는 말에, 김병연은 불현듯 달포 전에 만났던 <취홍정>의 늙은이가 연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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