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37 회
방랑길 떠나다
취옹정에서 돌아온 그날부터 김병연은 집을 나간 궁리만 골똘하게 하고 있었다. 가족들과 인연을 끊어 버리고 한평생을 떠돌이로 살아갈 결심이었다.
그러나 가족과 인연을 끊는다는 것이, 말은 쉬워도 실천에 옮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말 한마디 아니하고 혼자 가슴을 태우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김병연은 모처럼 굳게 먹었던 결심이 자꾸만 흔들렸던 것이다.
(조부님에 대한 죄악도 용서받지 못할 일인데, 이제 집을 나간다는 것은 어머니에 대해 또 하나의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어머니를 생각하면 집을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 김병연은 날마다 얼빠진 사람처럼 방구석에만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 이씨 부인은 아들의 비위를 건드리기가 두려운지 일체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누라만은 남편의 행동거지가 비위에 거슬리는지,
「당신은 글 공부를 계속해 과거를 보실 일이지, 언제까지나 빈둥빈둥 누워만 있을 작정이세요?」
하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털어놓는다.
<부부간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라고 하던가. 마누라는 자기를 위해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모양이었다.
김병연은 대답을 아니하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나더러 과거를 보라구?............ 내가 과거를 보아 판서 대감이 돼야만 자기가 정경부인이 되겠다 싶은 모양이지? 어머니는 나의 고민을 알고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데, 마누라장이는 왜 저렇게도 말이 많을까? 아무래도 나는 가족들과의 인연을 끊고 집을 나가야겠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어느 날 저녁에, 어머니가 아들을 안방으로 불러들여 조용히 말한다.
「네가 조부님 일로 괴로워하는 심정은 이 에미도 잘 알고 있다. 괴로운 심정이야 어디 너뿐이겠느냐. 이 에미도 마음이 괴로와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까지나 괴로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김병연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다시 말한다.
「너는 젊은 나이에 언제까지나 방구석에만 들어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분 전환을 위해 홍성(洪城)에 있는 외가에나 한 번 다녀오면 어떻겠느냐 너의 외삼촌은 학식이 풍부한 어른이시니까 외삼촌과 함께 글 토론을 해보는 것도 네게는 좋은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씨 부인의 큰 오라버니 이길원 (李吉源) 홍성 지방에서는 소문난 학자였다. 그러기에 이씨 부인은 친정 오빠를 통해 아들의 마음을 돌려 보려는 생각에서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병연은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전연 딴 생각을 하였다.
(옳다 됐다. 외가에 간다는 핑계로 집을 나가자.)
김병연은 마음속으로는 전연 엉뚱한 생각을 먹고 있으면서, 어머니에게는 이렇게 꾸며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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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38 회
「어머니는 참으로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머니 말씀대로 일간 홍성 외가댁에 한번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어머니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잘 생각해 주었다. 너의 외삼촌 어른은 워낙 생각이 많으신 어른인지라, 네 앞길에 대해 반드시 좋은 충고를 들려주실 것이다」
「삼사 일 내로 떠나가 외삼촌을 꼭 만나 뵙도록 하겠읍니다.」
김병연은 집을 나갈 구실이 생기자, 그날 밤으로 아무도 모르게 갓장이 집을 찾아갔다. 이제부터는 양반 행세를 해서는 안 되겠기에. 숫제 죄인임을 자처하는 의미에서 갓 대신에 줄곧 삿갓을 쓰고 다닐 결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인 양반, 나 삿갓 하나 만들어 주시오.」
늙은 갓장이가 즉석에서 반문한다.
「삿갓이라뇨? 방갓(方笠) 말이오?」
「방갓은 상제가 쓰고 다니는 삿갓이지요. 나는 상제는 아니니까, 운두가 평평한 보통 삿갓을 만들어 주면 되오.」
「상제도 아닌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삿갓을 쓰고 다니려고 그러오?」
「그럴 사정이 있어서 그러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큼직한 삿갓으로 만들어 주시오.」
「상제도 아닌 젊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물골 사납게 삿갓을 쓰고 다니려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구료.」
「이해를 못해도 좋으니 영감님은 주문대로 물건만 만들어 주면 될게 아니오」
「그건 그렇소마는..........」
갓장이 늙은이는 그렇게 말하며 김병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수염이 수세미처럼 자란데다가, 망건 바람의 머리가 어지럽기 짝이 없어, 누가 보아도 미친 사람 같은 몰골이었다.
갓장이는 김병연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다가 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쯔쯔쯔.......제법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아깝게도 정신이 돌아버렸군 그래」
김병연의 귀에 그 말이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돌았다>는 말이 왜 그런지 모르게 마음에 흡족하였다.
(그렇다! 하늘을 보기가 부끄럼럽도록 중죄를 범한 내가 어찌 미치지 않을 것인가. 나는 미쳤기 때문에 가족들과의 인연조차 끊어 버리고 집을 나가려는 것이 아닌가.)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듣자, 김병연은 갓장이 늙은이에게 선금을 듬뿍 내주면서,
「내가 꼭 필요해서 그러니 삿갓을 큼지막하게 만들어 주시오.」
하고 다시 한번 다져 말했다.
이날 밤에 주문한 삿갓이 한평생의 친구가 될 줄은 김병연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방랑의 길을 떠나는 데 필요한 물건은 오직 삿갓과 지팡이 하나뿐이었다. 죄인이 죄인답게 살아가려면 해를 보지 않기 위해 삿갓만은 꼭 쓰고 다녀야 하겠고, 정처 없는 길을 무한히 걸어다 니려면 몸을 의지할 지팡이 하나만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길 떠날 준비가 갖추어지자, 김병연은 어느 날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든 채 어머니 앞에 나타났다.
등에 조그만 바랑을 하나 짊어지고 있기는 하나, 그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은 오직 붓 한 자루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 는 책 한 권뿐이었다. 생소한 지방을 한량없이 떠돌아다니려면 《동국여지승람》 같은 안내 서적만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어머니! 저 이제부터 홍성 외가댁에 다녀오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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