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1 회
장원 급제
지금부터 1백 60년 전인 1826년(순조 32년) 늦은 봄 어느 날, 이날 영월 지방에서는 수많은 유생들이 새벽부터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읍내에 있는 동헌(東軒)으로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이날이 바로 영월 고을에서 백일장을 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자기 집에서 글만 읽고 있던 선비들이, 이날은 백일장을 보려고 2, 30리나 4, 50리의 먼 곳에서부터 동헌으로 동헌으로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백일장이란 어떤 것인가.
백일장이란 초야(草野)에서 학문을 닦고 있는 무명 유생(無名儒生)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각 고을 단위로 글짓기대회를 하는 일종의 <지방 과거(地方科擧) >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백일장을 시행할 때에는 과거의 형식을 본받아, <시관(試官)이라는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 그리하여 시관이 <시제(試題)>를 내걸면 응시자들은 그 자리에 시문(詩文)을 지어 바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급락(及落)을 가리는데, 그중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한 사람을 장원(壯元)이라고 부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백일장 제도는 조선 왕조 세 번째의 임금이었던 태종 때에 생겨난 것이다.
태종은 어느 날 (1414년 7월 17일) 성균관 명륜당(成均館 明倫堂)에 들르셨다가, 5백 명의 관원(館員)들에게 <시무책 (時務策)을 글로 써서 바치라>는 분부를 내리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시초 가 되어 백일장 제도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 이후로 백일장 제도는 각 고을마다 성행하였다. 그것은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들에게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날 동헌에 모여든 응시자의 수효는 백 명이 훨씬 넘었다. 응시자의 연령층도 천차 만별이어서, 백발이 성성한 육십객 노인도 더러 끼어 있는가 하면,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김병연도 이날 응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병연의 나이는 갓 스물, 자(字)는 성심(性深)이요, 호(號)는 난고(蘭皐)다.
응시자들은 시험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모두들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김병연만은 먼 하늘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 백일장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백일장에 급제를 못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김병연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병연은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전후에 이미 《사서 삼경(四書三經)》에 통효(通曉)하였다
게다가 시재(詩才)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 오고 있는 그는, 고금의 시서(詩書)와 사서 (史書)를 닥치는 대로 섭렵(涉獵)해 왔기 때문에 지금은 모르는 글이 없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본시 글공부만 좋아했을 뿐이지, 공명성이나 출세욕 같은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기에 백일장에는 애시당초 응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출세를 하려거든 서울에 올라가 어엿하게 과거에 응시할 일이지, 지지리 못나게 누가 백일장 따위를 보고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백일장을 보러 온 것은 홀어머니 이씨의 부탁이 너무도 간곡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어머니 이씨는 영월 고을에서 백일장을 보인다는 소문을 누구한테서 들었는지, 아들을 자기 앞에 불러 놓고 간곡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얘야! 우리 고을에서 내일 백일장을 보인다는구나, 이번에는 너도 한번 응시해 보도록 하거라. 이 에미의 간곡한 부탁이다.」
김병연은 어머니의 말에 적이 놀랐다.
「어머니! 백일장은 과거와 달라, 장원 급제를 해도 벼슬을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런 시험을 무엇 때문에 봅니까.」
그러나 어머니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진지하고 엄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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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2 회
「네 학문이 어느 정도인지 이 에미는 그것이 알고 싶어 그런다. 말이야 바른 대로 말이지, 백일장에 장원 급제할 실력이 있으면 과거를 제대로 보아서 우리 가문을 다시 한번 일으켜 놓으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느냐.」
그 말에 김병연은 깜짝 놀라며, 즉석에서 이렇게 반문하였다.
「어머니! 우리 가문을 다시 한번 일으켜 놓다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머니는 평소에 <우리 가문은 이름없는 양반 가문일 뿐이라고 말씀해 오시지 않으셨읍니까. 그런데 오늘따라 <우리 가문을 다시 한번 일으켜 놓으라>고 하시니 그 말씀은 무슨 뜻이 웁니까. 우리 가문에도 제가 모르는 무슨 빛나는 역사가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크게 당황하는 빛을 보이며,
「아, 아니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네가 출세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허황된 말을 지껄였을 뿐이다. 아무튼 이번 백일장에는 꼭 응시해 보도록 하거라!」
하고 허겁지겁 휘갑을 쳐버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김병연은 어머니의 당황하는 태도에서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다.
(어머니는 우리 가문의 역사에 대해, 무엇인가 나에게 숨겨 두고 있는 일이 있었구나!)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즉석에서 다그쳐 묻기는 어쩐지 민망스러워
「좋습니다. 어머님이 그토록 소원이시라면 내일 백일장에 응시하기로 하겠읍니다.」
하고 새벽같이 집을 떠나 동헌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백일장을 보러 온 지금 이 순간에도 어젯밤에 어머니가 무심중에 비쳐 보였던 <가문의 비밀>만이 마냥 궁금하였다.
(도대체 우리 가문에 내가 모르는 어떤 과거가 있었더란 말인가. 어머니의 말씀대로 영광스러운 과거가 있었다면, 어째서 나한테는 그런 일을 숨겨 오고 있었더란 말인가.)
김병연은 어젯밤에 어머니가 무심중에 들려준 말을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그러잖아도 김병연은 철이 들어가면서 자기 가문의 내력을 어머니에게 여러 차례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언제나 판에 박은 듯이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우리 가문이 양반 가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조상 때부터 아무도 벼슬은 못 해 왔다. 게다가 너의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 가문이야말로 이름없는 양반 가문일 뿐이다.」
김병연은 그와 같은 대답을 하도 여러 차례 들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말을 그대로 믿어 왔었다.
그도 그럴밖에 없는 것이, 김병연은 어려서는 황해도 곡산(谷山) 산골에서 홀어머니 그늘에서 자랐고, 열 살 전후에는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살았고, 그 이후에는 강원도 영월 산속으로 이사를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마치 무엇엔가 쫓겨 다니는 무자리(流民) 모양으로, 3년이 멀다하게 이 지방 저 지방으로 유랑 생활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어머니의 설명에 의하면, <아버지가 세상을 일찍 떠나셨기 때문에, 어린 너희들을 데리고 살아갈 길을 찾느라고 부득이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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