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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55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4. 12. 15:57

방랑시인 김삿갓 1-55 회

「시장하다는 양반이 무슨 군말씀이 그렇게 많아요. 어서 닭고기나 드시우」

그리하여 술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술에는 김삿갓도 자신이 있었지만, 백수건달은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마셔도 한이 없었다.

백수건달이 술을 마구 마셔대는 것을 보자. 주모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김삿갓에게 귀띔을 해준다.

「저 사람은 술을 한번 폭음하고 나면 열흘 가량은 앓아눕는 버릇이 있다우.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게 권하지 마세요.」

주모의 은근한 보살핌에 김삿갓은 내심 감격해 마지않았다. 아까는 백수건달이 닭 값을 많이 받아 주려고 애를 쓰더니, 이번에는 주모가 백수건달의 건강을 걱정해 주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아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순박하고도 아름다운 인정인가 싶었다.

김삿갓과 백수건달은 오다가다 우연히 만난 <노방의 타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술잔을 나누는 동안에 서로 간에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흉금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려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노출시켜 버린다는 뜻이다. 거기에는 용기와 자신감이 따라야만 하는 법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이미 온갖 명리를 포기하고 걸객으로 자처해 오는 몸이고 보니, 그런 용기와 자신감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치가 않았다.

김삿갓 편에서 애초부터 마음에 장벽을 두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나오니, 백수건달도 부지불식간에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쉽사리 가까워 지게 되었다. 

출호이자 반호이 (出乎爾者 反乎爾) 라고 하던가. 이쪽에서 마음을 터놓고 손을 내밀어 보이니, 상대방도 무심중에 그 손을 잡아 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흉금을 터 놓고 기탄없는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 그들 간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우정조차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친밀감은 양반 사회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아름다운 인간미>였다.

(인생이란 이렇게 살아가야만 옳은 것이 아닐까.)

김삿갓은 양반 사회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았다. 양반들은 언제나 마음속에 담을 쌓고, 사람을 오직 이해 (利害)로서만 대한다. 자기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상대일 경우에는 체면 불구하고 아첨까지 해가면서 환심을 사기가 예사요, 자기에게 불리한 사람을 대할 때에는 거드름을 피워 가며 상대방을 숫제 무시해 버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양반 사회에서는 이욕과 명리와 가면의 허수아비만이 난무하고 있을 뿐, 정작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위 민초(民草)라고 불리는 서민들의 생활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에게는 <마음의 장벽>이라는 것이 없다. 

남의 슬픔을 나도 같이 슬퍼해 주고, 나의 기쁨을 남과 함께 나누어 가지면 서, 언제나 동고동락하는 것이 서민 생활의 특징이 아니던가.

김삿갓이 <말 탄 양반>에게 술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을 때, 양반장이는 사람을 넘보고 말꼬리만 붙잡고 늘어졌을 뿐 술집은 끝끝내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백수건달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툭 털어놓고 나와서, 술을 몇 잔 나누는 동안에 어느덧 백년지기와 같은 사이가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마음이 천리면 지척도 천리요,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 이라는 옛말이 있거니와, 그런 점으로 따져 본다면, 마음속에 담을 쌓고 살아가는 족속처럼 불쌍한 인간은 없어 보였다.

(한집안 식구가 따로 있을까. 어디를 가도 인정만 오고가면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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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56 회

김삿갓은 백수 건달과 어울려 술을 마셔가며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친근감이 느껴지기로 말하면, 술집 <연연)의 주모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기 집 씨암탉을 보물처럼 아껴 오던 주모였건만 <시장해 못 견디겠다>는 김삿갓의 말을 듣고 나서, 그처럼 아껴오던 씨암탉을 두말없이 잡아온 것은 인정미가 얼마나 흘러 넘치는 증거였던가.

그나 그뿐이랴. 백수 건달과 주모는 각별한 사이가 아니면서도 서로를 도와주고 서로를 아껴 주려고 애쓰고 있으니, 그야말로 참다운 인간미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주모는 홀아비에게 업혀 가다가 사내의 불알을 붙잡고 늘어짐으로써 자신의 정절을 끝까지 고수해 온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원색적인 행동이었다고 비방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적당히 얼버무리며 살아가려는 풍조가 농후한 이 세상에서, 주모는 자기 자신을 그만큼 준엄하게 지켜오고 있는 증거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 아니겠는가.

김삿갓은 주모와 백수건달의 꾸밈새 없는 인간미에 반해 사흘 동안이나 붙박이로 술을 마셔대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 오면, 그 자리에 쓰러져 한참 늘어지게 자고 나서 또다시 술을 마시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흘째 되는 날 조반 후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주모에게 묻는다.

「오늘은 길을 떠나야 하겠소. 술값은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주모는 몹시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돈을 안 받았으면 좋겠지만, 살림이 워낙 군색해 전연 안 받을 수는 없는 일이고.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궁리에 잠겨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다.

「열 낭만 주세요.」

김삿갓은 술값이 너무도 헐한 데 깜짝 놀랐다.

「열 냥이라뇨? 둘이서 사흘 동안이나 먹고 자고 하면서 술을 연달아 퍼마셨는데, 열 냥은 너무도 헐하지 않소. 게다가 씨암탉 값도 있는데..........」

이번에는 백수 건달이 중간에 끼어든다.

「삿갓 선생! 주모의 말대로 열 냥만 주시오. 인생은 인정으로 살아가야 할 일이지, 돈으로 살아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열냥이면 본전은 될 거요. 삿갓 선생 같이 좋은 분을 우리가 언제 또 만날 수 있겠소.」

지난번에는 닭 한 마리를 잡아 주고 열 마리 값을 받으라고 부추겼던 백수건달이었지만, 이제는 술값을 체감해 주려고 애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어차피 며칠이 못 가서 죄다 없어질 돈 이오. 그러니까 열닷 냥만 받으시오.」

주모의 손에 돈을 억지로 쥐어 주고 술집을 나서자 백수건달과 주모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다시는 만나기가 어렵겠지요?」

하고 이별을 아쉬워한다.

김삿갓은 대답 대신 시 한 구절을 읊어 보였다.

오늘 아침에 한번 헤어지면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오.

今朝一別後 (금조일별후)
何處更相逢 (하처갱상봉)

이별은 슬퍼도 마음만은 흐뭇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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