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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57 회

이종육[소 운(素 雲)] 2025. 4. 13. 15:33

방랑시인 김삿갓 1-57 회

뜻밖에 생긴 일

금강산에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김삿갓은 길을 잘 모른다. 그러나 금강산이 동북방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덮어놓고 그 방향으로 발길을 옮겨 나간다. 한 달 걸려 못 가면 두 달에 가도 그만이요, 금년에 못가면 명년에 가도 그만인 지극히 한가로운 나그네길이었다.
걸음을 옮겨 나가며 얼굴을 들어 보니, 눈앞은 오직 천산 만수 뿐이다. <산중수복의무로(山重水複疑無路)〉라는 옛날 시가 말해 주듯이, 산이 병풍처럼 사방으로 첩첩이 둘러서 있는데다가 물은 골짜기마다 흐르고 있어서 길을 찾는다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산들바람이 가을을 느끼게 해주기에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높푸른 하늘가에 흰구름이 한두 조각 둥둥 떠돌아 가고 있다. 김삿갓은 허공 중에 떠돌아 가는 구름을 허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설봉 대사(雪峰大師)의 <부운(浮雲)>이라는 시를 연상하였다.


뜬구름은 오는 곳이 없고
가는 곳 또한 종적이 없도다 
구름의 오감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오직 허공뿐이로구나.

浮雲來無處 (부운래무처)
去也亦無踪 (거야역무종)
細看雲去來 (세간운거래)
只是一虛空 (지시일허공)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아, 인생 자체가 뜬구름처럼 허무한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어떤 중은 금강산 구경을 가는 도중에 잠깐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 다음과 같은 시를 읊은 일도 있었다.

늙은 중이 바랑을 베고 낮잠을 자며
꿈속에 금강산을 향해 걸어가다가
우수수 나뭇잎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서산머리에 가을해가 저물었도다.

老僧枕鉢囊 (노승침발낭)
夢踏金剛路 (몽답금강로)
蕭蕭落葉聲 (소소낙엽성)
驚起秋山暮 (경기추산모)

그것 역시 인생의 무상을 읊조린 노래임이 틀림없었다.
얼마를 가다 보니 나루터가 나온다. 그냥 건너기에는 너무도 넓고 깊은 냇물이었다. 나루터에는 나룻배가 한 척 떠 있었다. 그러나 배는 있어도 사공이 없지 않는가.

나루를 건너려면 사공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밖에 없었다.
모래밭을 서성거리고 있노라니까 거무하에 사공이 나타난다.

그러나 사공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 사공이었다. 나이는 30세 가량 되었을까 얼굴도 제법 반반한 편이었다.

「여기가 어디요?」
「정선 땅, 광탄나루〔廣灘津〕라오...건네드릴 테니 배를 타시오」

여자 편에서 서슴지 않고 <배를 타라>고 하는 소리에,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하였다.

「배를 태워 주신다니 고맙구료.」

여자 뱃사공은 노를 저어 나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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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58 회

김삿갓은 사공의 옆 모습을 그윽히 바라보다가 적이 놀랐다. 그 여인의 옆 모습이 자기 마누라의 옆 얼굴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나룻배는 기슭을 떠나 물위로 둥둥 떠나가고 있었다.
김삿갓은 뱃사공의 옆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마누라를 생각해 보았다.

(마누라는 내가 정말로 외가집에 간 줄로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지금쯤은 내가 돌아오기를 몹시 기다리고 있을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누라에게 죄책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나를 믿고 시집 온 마누라를 생과부로 만들어 놓았으니, 나는 또 하나의 죄악을 범한 셈이로구나.)
그렇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방랑의 길에 오른 몸이 집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럴수록에 민망스러운 느낌이 절실하여, 또다시 여자 뱃사공의 옆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공은 나룻배를 멋들어지게 저어 나간다. 사공의 옆 얼굴이 보면 볼수록 마누라와 흡사해 보여서 김삿갓은 마누라가 나룻배를 저어 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뱃사공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여보, 마누라!」

하고 사뭇 정다운 어조로 뱃사공에게 말을 걸었다.

무심히 배를 저어 나가고 있던 여자 뱃사공은 <마누라>라는 소리에 질겁을 하며 놀란다.

「아이 망측해! 내가 왜 당신 마누라란 말요.」

김삿갓은 얼결에 수작을 걸기는 했지만, 상대방의 반문을 받고 보니 할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서기는 대장부의 체면이 용납치 않아 얼른 이렇게 꾸며 대었다.

「나는 지금 당신 배를 타고 있소.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마누라가 분명하지 않소, 하하하.」
.「............」

여자 뱃사공은 배포가 놀랍도록 유한 편이어서, 먼 하늘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배가 나루터에 도착하여 김삿갓이 배에서 뭍으로 내려서며,

「잘 태워 주어서 고맙소이다.」

하고 말하자, 여자 뱃사공은 김삿갓에게 작별 인사를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아들아이야, 잘 가자.」

이번에는 김삿갓이 놀랄밖에 없었다.

「여보시오, 내가 어째서 당신 아들이란 말이오.」

그러자 뱃사공은 짜장 아들 취급하듯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그대는 금방 나의 뱃속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나의 뱃속에서 나왔으니 틀림없는 내 아들이 아닌가.」

아무러한 김삿갓도 거기에는 할말이 없었다. 코가 납작해진 김삿갓은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며 앙천 대소를 할밖에 없었다.

「하하하...내가 졌소이다.」

지기는 졌으나 유쾌하기 짝이없는 농담이었다.

(인생이란 역시 이런 일이 있어서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나룻배에서 내려온 김삿갓은 인적 없는 산속을 유유히 걸어 나가며 혼자 한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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